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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이와 함께 묵은 모텔에 있던 낯뜨거운 물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78)

아침에 동네를 산책하는데 어느 집 앞에서 한 가족이 집주인과 인사한다. 여덟 살쯤 된 아이가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올게요. 기회 되면” 하는 걸 보고 크게 웃었다. ‘기회 되면’이라니! 어른 말투를 배웠겠지만, 빈말이라도 귀여웠다. 주인도 “구경 잘하고 운전 조심해서 잘 올라가요, 늘 건강하시고”라며 덕담해준다.

이곳 한옥 마을에는 한옥을 약간씩 손봐서 저렴하게 빌려주는 숙소가 많다. 방이 좁고 침대가 없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조용히 하룻밤 지내고 가는 가족 단위 손님의 표정은 대체로 밝다. 그 정도면 여행 2일 차를 즐겁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모텔(Motel)은 미국 고속도로 곳곳의 ‘자동차 여행자들(Motorists)의 숙소(Hotel)’에서 유래한 저렴한 숙소 형태다. 1990년대 초에 1박에 20~25달러 정도였던 기억이 있는데, 시설은 TV, 전화기, 화장실과 샤워기가 전부였다. [사진 pixabay]

모텔(Motel)은 미국 고속도로 곳곳의 ‘자동차 여행자들(Motorists)의 숙소(Hotel)’에서 유래한 저렴한 숙소 형태다. 1990년대 초에 1박에 20~25달러 정도였던 기억이 있는데, 시설은 TV, 전화기, 화장실과 샤워기가 전부였다. [사진 pixabay]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가족여행을 많이 다닌 우리는 늘 숙소가 문제였다. 시간 들여 좋은 곳을 예약할 때도 있지만, 갑자기 훌쩍 떠날 때는 허름한 곳에 묵기도 했다. 오래전 어느 지역을 여행할 때, 읍내 서너 개 모텔과 여관 가운데 식당 주인에게 가장 좋다는 곳을 추천받아 들어갔는데 참 막막했다. TV 예능프로그램을 보겠다는 아이들에게 성인방송이 노출되지 않도록 “몇 번 뒤쪽은 절대 안 돼”라고 단단히 일렀지만, 까딱 잘못해 어른 세계의 추악함이 드러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이튿날 나올 때는 복도에 요란한 성인용품 판매기가 있어 몸으로 급히 가렸지만, 아이가 보았다. 뭐 하는 물건이냐는 물음에 대답 못 한 채 급히 화제를 돌리느라 고생했다. 기분 씁쓸하고, 그 지역 이미지도 걱정되어 군청에 이메일을 보냈더니 담당자는 별 문제의식이 없는 듯 ‘지속적인 계도 활동’이라는, 하나 마나 한 내용을 예의 바르게 보내왔다. 그 후로 가족여행을 계획할 때 아무리 좋은 곳이어도 콘도가 없으면 일단 배제했다.

객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숙소 형태는 다양하지만 여러 여건을 고려할 때 가장 대중적인 것은 호텔과 모텔이다. 그러나 호텔은 요금이 비싸고, 모텔은 가족과 함께 지내기에 부적절한 곳이 많다는 게 문제다. [사진 pixabay]

객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숙소 형태는 다양하지만 여러 여건을 고려할 때 가장 대중적인 것은 호텔과 모텔이다. 그러나 호텔은 요금이 비싸고, 모텔은 가족과 함께 지내기에 부적절한 곳이 많다는 게 문제다. [사진 pixabay]

그런데 콘도는 아파트와 비슷하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기껏 도시를 빠져나와 산과 들, 강을 지나 도착한 곳은 다시 콘크리트 고층건물. 들어서면 텔레비전과 에어컨부터 켜고, 소파에 눕고, 아이들이 밖에 나가자고 하면 귀찮아한다.

젊은 시절 엠티의 추억이 깃든 민박집은 어떤가. 도시로 나간 자녀의 방을 내주고 새벽에 군불 때주던 민박은 이제 없다. 본격 숙박업이지만 시설이 낡거나 정형화되지 않아 불편하고, 이용 정보가 많지 않아 까딱하면 돈은 돈대로 쓰고 불편을 감수할 위험이 크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휴양림은 저렴한 이용료에 관리상태도 훌륭하지만, 워낙 인기 높아 주말이나 성수기 예약이 어렵다. 또 깊은 산자락에 있어 자기 차 없으면 이용하기 힘들다. 게스트하우스는 가격과 시설 면에서 좋지만 1~2인 여행자 중심이다.

언젠가 묵었던 모텔은 깨끗한 건물에 스타일러, 금고, 정수기, 컴퓨터 등 최신 설비가 갖추어져 호텔보다 못할 것이 없었지만 성매매 전화번호가 적힌 티슈 곽을 보는 순간 기분이 찜찜해졌다. [사진 박헌정]

언젠가 묵었던 모텔은 깨끗한 건물에 스타일러, 금고, 정수기, 컴퓨터 등 최신 설비가 갖추어져 호텔보다 못할 것이 없었지만 성매매 전화번호가 적힌 티슈 곽을 보는 순간 기분이 찜찜해졌다. [사진 박헌정]

결국 남는 건 호텔과 모텔인데, 이름 알만한 호텔은 자주 이용하기에는 비용부담이 크다. 반면 모텔은 저렴한 숙박비와 어느 곳에나 있다는 게 경쟁력이다. 시설만 보면 손색없다. 대형 TV, 냉장고, 컴퓨터, 정수기, 호화로운 욕실은 기본이고, 어떤 곳은 우리 집에도 없는 스타일러와 금고까지 있다.

그런데 다방 연락처가 적힌 곽 휴지, 피임 도구, 성인 방송 같은 공공연한 음란성이 치명적이다. 물론 누군가에겐 필요할 수 있겠지만, ‘연인의 공간’에 대한 민망함을 넘어 불법 성매매 흔적까지 발견된다.

많은 곳이 그런 현실이니, 깨끗하고 다양한 시설에도 불구하고 잠자리를 찾는 손님은 “에이, 지저분해서…” 하며 말끝을 흐리고, 할 수 없이 이용할 때는 “대충 자자” 한다.

나올 때는 빈 통에 열쇠 던져넣고 나오면 끝, 주인이든 누구든 서로 안 보는 게 좋다. 최근 여행작가들과 바닷가 도시의 무인텔에서 잔 적 있는데, 체크인 기계를 조작하지 못해 더듬대니 어디선가 주인아저씨가 나와 가르쳐주고 사라졌다. 무인의 목적은 인건비 절감이 아니다.

지자체가 놀러 오라며 별별 축제를 만들지만 정작 중요한 여행 인프라는 간과하고 있다. 사람들은 1박 2일 계획하고 찾아가서 즐기다가도 잠자리가 마땅치 않으면 밥 한 그릇 사 먹고는 밤새 운전해서 돌아온다.

가족여행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도 객지에서 안전하고 쾌적한 숙소는 중요하다. 해마다 대입 면접이나 논술시험 보러 가는 학생은 숙소 때문에 고생한다. 일 때문에 수시로 객지로 다니는 사람도 많다.

자녀와 함께하는 가족여행 숙소는 비싸거나 호화롭지 않아도 된다. 즐거운 추억과 행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안전성과 쾌적함이 가장 중요하다.

자녀와 함께하는 가족여행 숙소는 비싸거나 호화롭지 않아도 된다. 즐거운 추억과 행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안전성과 쾌적함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불야성을 이루는 소위 ‘모텔촌’을 보면 숙박과 휴식이라는 본래 기능을 외면할수록 돈을 더 벌고, 비상업지역 업소는 손님이 없어 힘든 것 같다. 정부나 지자체가 조금만 신경 써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주고 끌어주면 여행객은 편안하고 업주도 이익일 것 같은데 완전히 관심권 바깥인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이제 아이들이 따라다니지 않으니 모텔에서 ‘대충’ 자도 된다. 그러나 어린 자녀가 있는 젊은 아빠, 엄마의 입장은 다르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쉬면서 재정비할 수 있는 숙소가 가장 중요하다.

가족여행은 화려함보다 건강함이 우선이다. 그래서 코로나 19 속에 여행도 최대한 자제하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여행 인프라는 건강하고 안전한지 모르겠다. 적당한 비용으로 쾌적한 숙소에 묵으며 추억과 휴식을 얻고 싶은데, 왜 이해관계자들은 전부 모른 척하는 걸까.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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