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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은퇴 후 나에게 박수 쳐 줄 응원단 확보해둬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77)

여유로운 은퇴 생활을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대비를 한다. 그런데 가끔 많은 물질적 요소를 갖추고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얻는 정겨움과 친밀감이 없다면 인생은 무겁고 지루할 것이다. [사진 pixabay]

여유로운 은퇴 생활을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대비를 한다. 그런데 가끔 많은 물질적 요소를 갖추고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얻는 정겨움과 친밀감이 없다면 인생은 무겁고 지루할 것이다. [사진 pixabay]

아내와 커피를 마시며 ‘은퇴 후에 가장 중요한 게 뭘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와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돈 같은 것 말고, 이것 하나면 되겠다 싶을 만큼 절실하고 현실성 있는 것 말이다.

여유로운 은퇴생활의 하드웨어가 ‘돈과 건강’이라면, 그것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행복감’이다. 그런데 은퇴를 앞둔 중년은 얼마나 행복감을 느낄까? 대부분 심리적으로 두렵고 복잡한 상태일 것 같다. 당장 경제적인 불안감도 있을 테고, 바깥세상은 생각보다 냉랭하고 모질다는 선배의 경험담에 겁먹어 세상에 대한 기대수준을 미리 낮추기도 한다.

나 역시 ‘퇴직하면 어디 가서 돈 백만 원이나 빌리겠나’하는 생각으로 조심스레 세상을 대했다. 그런데 닥치고 보니 세상인심은 돈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정도 말라가고 있었다. 매여 있는 사람은 시간이 없고, 풀려난 사람은 마음이 바쁜지 오붓하게 술 한잔하며 이야기 나눌 사람이 많지 않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없으면 사람을 만나도 사람이 그립다. 이러다 노년의 삶이 사막처럼 건조하고 황량해질까봐 두렵다. 나만 그런가 싶어 물어보니 다들 사정이 비슷하다. “나를 믿고 칭찬해주는 사람? 글쎄?”

바쁜 도시의 직장생활 속에서 특별한 계기나 신뢰 관계 없이 맺는 인간관계는 퇴직과 동시에 허망하게 사라져버리기 쉽다.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인맥관리다. [사진 pixabay]

바쁜 도시의 직장생활 속에서 특별한 계기나 신뢰 관계 없이 맺는 인간관계는 퇴직과 동시에 허망하게 사라져버리기 쉽다.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인맥관리다. [사진 pixabay]

결국 아내와 나는 은퇴 후 노년으로 갈수록 나와 주변의 관계, 즉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과의 친밀감’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돈이 있든 없든, 삭막하고 우울하게 살지는 않아야 하니 말이다.

나의 경우 글쓰기가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글이 처음 지면에 나왔을 때 주변에서 축하와 찬사를 보내주어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개업 후 지인들로 붐비다가 금방 썰렁해지는 식당처럼, 내 글에 대한 관심도 금세 시들해졌다. 그만큼 응원을 받았으니 이제 홀로서기 해야지하는 생각과 돈 드는 것도 아닌데 한번 읽어주기가 그렇게 힘든가 하는 서운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주변에 관심을 가졌던가. 누군가를 응원하고 걱정해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친구와 마주 앉아 밥 먹는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회사일, 자식 걱정, 돈 걱정…. 늘 나 중심의 설계도에 따라 살았다. 내 일만 감당하며 살기도 버겁다 보니, 내게 필요 없어도 남 줄 생각은 못 하던 삶이었다. 그러니 남들이 내 글 안 읽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 삶에 할당된 내 몫이 그만큼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비교적 넓은 인맥을 만들었다. 그런데 허물없이 순수하게 친해진 사람과는 지금도 만나지만, 목적성만 가지고 만난 경우에는 퇴직과 함께 연락도 자연스레 끊어졌다. 게다가 명함 주고받고 술 마시며 익힌 안면으로 뭐 대단한 걸 얻어낼 만큼 세상이 물렁하지도 않고, 갑이든 을이든 현업에서 물러나면 피차 똑같은 처지였다.

그러니 대단한 야망을 품은 것 아니라면 혼자 헛물켜며 ‘센’사람 꽁무니 쫓아다니기보다 내게 편하고 정겨운 사람을 가까이에 많이 두는 것이 실속 있는 인맥관리였다. 나를 지지해주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때로는 별것 아닌 일에도 ‘오버’해서 반응해줄 응원단을 확보해야 한다. 그게 새롭게 이해한 인맥의 의미다.

나를 지지해주고 보듬어 주는 출발점은 가족과 친구다. 마음 놓이는 푸근한 모임도 하나쯤 있어야 정기적으로 이벤트를 만들며 친밀감을 나눌 수 있다. [사진 박헌정]

나를 지지해주고 보듬어 주는 출발점은 가족과 친구다. 마음 놓이는 푸근한 모임도 하나쯤 있어야 정기적으로 이벤트를 만들며 친밀감을 나눌 수 있다. [사진 박헌정]

그 출발점인 가족들의 지지를 얻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각자 자기가 집중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놓이는 푸근한 모임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 모임은 가까운 사람, 다소 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한 통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친밀감을 저축하고 꺼내쓰기 좋고, 이벤트도 자주 생긴다.

예전 어른들의 ‘친목계’가 생각난다. 한 동네에서 거의 일가친척 정도의 결속력을 가졌는데 특히 곗날 모임은 고단한 일상 속의 반가운 행사라 며칠 전부터 음식 장만이나 놀 계획을 세우면서 은근히 기대하시곤 했다.

엊그제 대학 동아리의 선배들이 이곳 전주에 와서 1박 2일 동안 함께 술 마시고 근교에도 구경 다니며 재미있게 지냈다. 은퇴한 60대 중반의 친구들이 서로 살갑게 챙기는 모습(비록 말은 무뚝뚝하지만)을 보니 ‘부유한 인생’의 면모가 느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변인, 응원단, 박수부대, 머슴, 팬클럽이 되어주었다.

얼마 전에는 한 강연에서 “가장 중요한 힘은 다른 사람의 힘을 키우는 힘”이라는 생태문명철학자 존 B. 캅 주니어의 말을 전해 듣고 감명받았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강한 힘이 있었구나! 내가 네게 주면, 네가 내게 주고, 또 내가…. 그럼 그건 무한동력 아닌가! 우리 일상에서는 서로 칭찬하고 한번 웃어주고 호들갑도 떨어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아닐까 싶다.

오늘날 이익사회의 속성을 잘 표현하는 말 가운데 ‘잡은 물고기한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라는 게 있다. 잡힌 입장에서, 또는 ‘한 편이 된’입장에서는 참 서운할 말이다. 그말처럼 그동안 회사에, 일에, 또는 미완의 어떠한 것에 전력을 다하느라 정작 고마운 사람에게 소홀했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은퇴 시점이 다가왔다면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바깥세상은 춥다는 말에 미리 겁먹지 말고 지금부터 잔디도 심고 꽃도 가꾸자. 내 가까이부터 소중히 여겨야 그들 마음에 내 지분이 생기고, 그게 은퇴 후 행복한 삶의 씨앗이 될 것이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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