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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50대에 시작하는 ‘나’에 대한 기록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75)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2020년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갔다. 이 세상에 큰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처음에는 조금만 버티면 될 거로 생각했지만 코로나19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예전 상황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버텨봐야 헛수고이고 우리 생활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한단다.

그렇게 시작된 ‘비대면(untact)’ 시대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살기 시작하니 일은 물론이고 참여할 활동이나 행사가 없어져 단절감과 무료함이 극에 달했다. 그래도 다행히 숨구멍 트이는 일을 찾아냈다.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써보자! 마침 시간도 많으니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

발단은 미국의 코로나 상황이었다. 내가 알던 미국은 세계 패권을 쥔 나라, 그런데 국민 1%가 코로나에 감염되고 십만 명 이상 죽고 대통령은 여전히 호언장담하는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의료강국? 복지국가? 민주적 합의? 글쎄…’ 하나둘씩 빼다 보니 이제 군사강국, 경제강국 두 개만 남았다.

문득 20대 시절에 뉴욕에서 보낸 1년이 떠오르며, 도대체 내가 알던, 풍요와 자유와 창의가 넘친다는 기회의 땅 미국은 어디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 오랜 시간 내 속에 아무 저항 없이 자리 잡고 있던 과거 사실과 기억이 현재 내가 가진 ‘관(觀)’과 배치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내 머릿속 기억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옛일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20대에 처음 접한 미국 사회는 풍요, 자유, 창의가 보장된, 세계 최강의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내가 알던 미국은 더 이상 없음을알았다. 오랜 시간 내 속에 아무 의심 없이 자리잡고 있던 사실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옛일을 하나씩 다시 꺼내보기 시작했다. [사진 pixabay]

20대에 처음 접한 미국 사회는 풍요, 자유, 창의가 보장된, 세계 최강의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내가 알던 미국은 더 이상 없음을알았다. 오랜 시간 내 속에 아무 의심 없이 자리잡고 있던 사실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옛일을 하나씩 다시 꺼내보기 시작했다. [사진 pixabay]

그런데 이런 글쓰기에 맞는 이름을 아무리 찾아봐도 ‘자서전’밖에 없다. 50대 중반의 자서전…. 자서전은 지나온 생을 쭉 돌아볼 만한 인생 후반에 또는 성공한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있을 때 쓰는 것 아니던가.

사실 뭔가 이룬 다음에 쓰겠다는 생각은 타당하면서도 비현실적이다. 인생을 관조할 수 있다 한들 기억의 한계 때문에 내 행적과 사실을 자세히 기록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떤 증거를 통해 나의 논리와 철학을 검증하고 신뢰하겠는가. 그래서 자서전이라는 낯간지러운 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자전적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도대체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해봤다. 일단 글재주 부릴 생각 말고 손끝의 힘을 빼야 할 것 같았다. 어느 틈엔가 붙어버린 체면과 아집의 힘 말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중장년, 노년이 될수록 내 원래 모습을 잃고 모두 똑같은 인간형이 되어간다. 나에 대해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데 나 혼자 득의양양해 봐야 공허함만 재생산할 것 같았다.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도 유지하고 싶다. 글의 힘은 진실에서 나온다는데, 자서전 쓰는 사람 대부분은 ‘진실한 증언’을 고민한다. 혼자만 아는 역사이니 얼마든지 미화나 정당화할 수 있고 거짓과 침묵(은폐)의 차이를 이용할 수도 있다. 나도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수다’도 조심해야 한다. 지금껏 묻혀 있던 내 인생을 꺼내 보다가 나 스스로 감동해 숙성되거나 실체가 형성되지 않은 감정, 현재의 나를 규명하거나 그 인과를 설명하는 데 도움 안 될 에피소드 같은 것을 마구 쏟아놓기 쉽다. 거기 재미 붙이면 평생에 걸친 ‘글짓기 소일거리’가 될 것이다.

흔히 자서전은 지나온 생을 쭉 돌아볼 만한 인생 후반에 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뒤로 갈수록 기억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굳이 자서전이라는 큰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자전적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사진 pixabay]

흔히 자서전은 지나온 생을 쭉 돌아볼 만한 인생 후반에 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뒤로 갈수록 기억의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굳이 자서전이라는 큰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자전적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사진 pixabay]

자서전은 나에 대한 산문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나’다. 세상 모든 사람이 제각기 자기만의 우주가 있고, 나 역시 내 머릿속에 나만의 우주를 가지고 산다. 그 우주를 통찰하고 연구할 책임은 나에게 있다.

자서전이라 해봐야 노트북에 써 내려 갈 뿐이지,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나올 계획은 없다. ‘수양’의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기억을 되살려 적다 보니 그동안 잊었던 일이 되살아나고, 곳곳에 나를 도와준 분들, 나의 철없던 행동이 몇십 년 떨어진 지점에서 ‘어른’의 눈으로 읽힌다.

- 유럽을 배낭여행 중인 사람들을 만나 보니 다들 나보다 성숙하고 착하고 자연스러웠다. 나는 세계인들 사이의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믿음과 질서’를 이해하고 따라가기에 아직 너무 경직되고 유치하고 옹졸했으며, 아는 것도 적었다. 나의 20대는 그 정도 수준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 한글학교에서 내가 보살피는 아이 가운데 흑인 혼혈인 네 살짜리가 있었다. 그 아이를 주목하게 된 건 그의 심한 장난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미 교민들이 그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인종차별과 갈등의 문제에서 비켜나 있는 줄 알았는데 나 역시 흑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 그 인정 많고 소박한 부부에게 나는 일면식도 없는 손님일 뿐인데 폐 끼치고 좋은 대접을 받았다. 지나간 일을 정리하다 보니 그저 혼자 감상에 젖는 게 아니라, 그렇게 내가 받고 잊었던 수많은 인연과 도움을 다시 기억하고 그들 아닌 누구에게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로 형상화된 나의 과거를 보면서 그동안 당당하게만 생각했던 나의 인생이 결국은 누군가의 호의와 도움으로, 게다가 많은 부분 운(運)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는다. 세상에 진 그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반성과 자각이 그 고마운 분들 귀에 닿을 수는 없겠지만, 인생을 살며 한번 느끼는 것과 끝내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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