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76)
요즘 집에서 일하는 ‘언택트’수요가 많아 2주 기다려야 한다던 복합기가 주문한 지 사흘 만에 왔다. 주문이 몰리니 서둘러 물건을 확보한 것 같다. 설명서 봐가며 설치하는데 처음부터 헷갈린다. 지시대로 카트리지를 끼웠지만, 본체가 안 닫힌다. 세게 누르면 부러질 것 같아 한참을 전전긍긍, 이런, 포장용 플라스틱을 안 뺐네. 별것도 아닌 일에 한 시간이나 걸렸다.
역설적으로 그런 굼뜬 동작이 나의 가장 효과적인 노하우다. 집안 곳곳을 손볼 때도 그렇다. 분수에 맞게 일을 해야지, 기술자 흉내 내다간 낭패 본다. 뭘 풀 때는 조립할 때 생각해서 폰으로 사진 찍어두고, 페인트칠도 소심하게 야금야금, 중간에 공구 찾으러 다니지 않도록 시작 전에 충분히 준비….
요즘은 소비자가 직접 사용 못 할 만큼 어렵게 만들어놓은 물건이 별로 없다. 설명서 봐도 모르겠으면 유튜브가 있다. 세면대 팝업 교체, 한 스위치에 전등 두 개 연결, 실리콘 작업 모두 유튜브에서 배워 천천히 하나씩 해결했다.
손재주만 그런 게 아니다. 온라인에서도 모바일 간편결제, 공인인증, 카드 등록, 지문 등록, ISP 설치…. 정신없지만 찬찬히 읽어보면 된다. 퇴직 후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으니 독학할 수밖에 없는데, 생각과 몸을 여유롭게 바꾸니 하나둘씩 아는 게 늘고, 그러면서 ‘천천히’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천천히’의 결정판은 자기 살 집을 직접 짓는 사람이다. 업자에게 맡기면 성에 안 차고 돈도 많이 드니 직접 해보겠다며 집 짓기 학교부터 시작해서 전문가 도움받아가며 몇 년에 걸쳐 짓는다. 존경스럽다.
‘천천히’가 정답인 건 알겠는데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실 아직도 식당에서 종업원이 천천히 움직이거나, 상대방이 밥을 아주 늦게 먹거나, ARS에서 뻔한 소리가 나오면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어려서부터 빠르고 능숙한 게 미덕이라고 배웠고, 그 습관 덕분에 먹고 살았으며, 퇴근 후 쉴 때조차 ‘생활의 달인’을 보며 빠른 손놀림에 감탄했으니 몸속에 ‘빨리빨리’ 유전자가 생긴 것 같다.
그러니 만사 귀찮다며 늘어져 있다가도 뭘 할 땐 정신 차리고 후딱 해야지, 느릿느릿한 건 문제 있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천천히’가 ‘익숙지 않음’, ‘더듬거림’으로도 여겨진다. 특히 회사에서는 늘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흐름을 추구한다. 비서실장 시절에 윗분 모시고 낯선 장소에 가면, 사전에 동선을 파악해도 현장에 도착하면 잠시 두리번거리는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윗분은 잠시 기다려주는데 오히려 다른 동행자들이 눈치 살피며 “어디야? 박 실장, 안 와봤어?” 하며 재촉한다. 그들이나 나나 ‘빨리빨리’와 ‘쩔쩔매기’에 인이 박였다.
어쩌면 그게 직장인의 숙명이라, 다섯 시 반에 일 주고, 일곱 시에 회식 장소에서 “언제 와?” 전화하고, 이튿날 아홉 시에 결과물 찾는 불가해한 현실에서도 버틸 수 있던 건 ‘빨리빨리’의 힘이었다. 그렇게 바쁘고 급한 삶을 표현하는 말은 ‘허겁지겁’이다. 출근도, 점심도, 보고도, 외근도 늘 허겁지겁했다.
어느 날 자정 넘도록 야근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집에도 못 가고 졸음 참으며 뭔가를 빨리, 많이, 완벽하게 만드는 목적이 뭘까. 결국은 승리를 인정받은 후 대량 폐기하기 위한 것 아닐까. 그게 자본주의 경쟁의 민얼굴이자 활력 아닐까.
현업을 떠난 이후 한동안 몸이 기억하는 그 조급함 때문에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서둘다가 종종 실수하곤 했다. 뭔가 빨리할 때는 시간이 없어 서두는 게 아니다. 빨리 해치우고 남는 시간에는 지루하게 빈둥댄다.
가끔, 자기 속도를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본다. 세상의 기준보다는 늦지만 꿋꿋하게 자기 방식대로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초에 세상 모든 일에는 우리 행복에 부합하는 정상 속도가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러다가 뭔가 더 얻기 위해 조금씩 빨라졌고, 그 속도를 선도하며 무리하게 구는 사람이 나왔고, 세상은 그들을 ‘부지런하다’며 칭찬했고, 우리 대부분은 그들을 표준으로 삼아 점점 본래 속도를 잊고 세상 속도대로 움직였다.
평생 그렇게 속도 높여 일하다가 일이 쏙 빠져나간 자리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습성만 남았다. 그러니 활동이 없을 때는 초조해진다. 여전히 바삐 움직이며 몇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고 싶겠지만, 잠시 쉬는 것도 나 자신을 채우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전의 속도감을 잊어야 한다. 전성기처럼 빨리해야 할 일은 남아 있지 않고, 더구나 느린 것은 빠른 것보다 효과가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중장년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적응하는 데는 느린 속도를 택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자기가 살 집을 몇 년에 걸쳐 쉬엄쉬엄 짓는 것처럼, 속도 싸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빨리빨리’가 부지런함이 아닌 것처럼 ‘천천히’도 게으른 게 아니다. 빨리하면 많이 할 수 있고 천천히 하면 충실해진다. 분위기 좋은 디저트 카페의 아이스크림은 천천히 음미하고, 더운 날씨에 뚝뚝 흘러내리는 ‘하드’는 호로록거리며 빨리 먹는 것처럼, 그 둘이 섞여야 행복하다.
우리 50·60세대는 대부분 빠른 것에만 익숙하다. 어떻게 하면 더 느리게 천천히 살 수 있을지 연구해보면 어떨까.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