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술병 누가 치웠나” 70대 노모 무죄 준 판사, 검경 꾸짖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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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법 형사15부(표극창 부장판사)는 술에 취한 50대 아들의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친모 A씨(76)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뉴스1

인천지법 형사15부(표극창 부장판사)는 술에 취한 50대 아들의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친모 A씨(76)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뉴스1

“피고인의 자백과 모순되는 증거가 없는 것에 만족할 게 아니라, 피고인의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50대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70대 노모에게 무죄를 선고한 인천지방법원 표극창 부장판사의 지적이다. 표 부장판사는 A씨(76)에게 무죄를 선고하기 직전 검찰과 경찰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A씨의 범행을 인정할 직접적인 증거는 본인의 자백과 A씨 딸의 진술뿐인 상황에서 수사기관이 더욱 신중히 수사했어야 한다고 꼬집은 것이다. 표 부장판사는 “그래야만 판결이 확정된 후 혹여 발생할지 모르는 국민의 의혹을 차단할 수 있고 수사와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슈추적]

①피의자 만취 상태였을 가능성 작아

4일 법조계에서는 인천지법이 하루 전 무죄를 선고한 것은 노모의 살해 방법이나 동기는 물론 사건 현장 정리와 범행 재연 등이 한결같이 석연치 않았던 점을 고려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표 부장판사는 공판 내내 고령의 노인이 몸무게가 102kg인 아들 B씨를 수건으로 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B씨가 만취 상태였다지만 A씨의 진술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했다.

검찰은 사망 당시 B씨의 혈중알코올농도를 토대로 범행 시점에 B씨가 만취 상태였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A씨 딸이 본인이 귀가한 오후 9시20분 이후에는 B씨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고, B씨 남매가 다투던 중 B씨가 과거 사건과 현재 상황을 언급했다는 점 등을 고려해 B씨가 만취 상태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②어머니의 어색한 범행 재연

법원은 A씨가 진술을 번복한 점에도 주목했다. A씨는 사건 당일인 4월 21일 오전 9시20분쯤에 벌어진 범행을 재연하면서 “아들이 거실 바닥 소음방지 매트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면서 술을 더 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에선 “술상을 치운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을 바꿨다.

표 부장판사는 “B씨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A씨 딸의 진술 등을 볼 때 피해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A씨의 진술은 명백하게 사실과 다른 내용이다. 기억이 잘못됐다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또 “A씨가 범행 재연 과정에서 목을 조르는 동작을 취하라는 요구에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점을 봐도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그대로 진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고 말했다.

③노모의 살해 동기도 의문

재판부는 노모의 아들 살해 동기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했다. A씨는 “아들이 술을 많이 마셔서 괴로웠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까 걱정돼 살해할 마음을 먹었다. 사건 당일 남매가 말다툼하는 것으로 보고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표 재판장은 “B씨가 무위도식하면서 술을 마신 기간은 10개월~1년 정도였다”며 “B씨는 동생과 그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술이 깨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점 등을 종합해볼 때 B씨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다고 해도 살해 욕구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B씨 남매의 말다툼에 대해서도 “B씨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④깨진 술병은 누가 치웠나?

A씨는 지난 4월 21일 오전 0시 53분 53초쯤 112에 신고하고 약 2분간 통화했다. 경찰이 도착한 오전 0시 59분 07초까지 A씨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3분쯤. 그 사이 A씨는 거실을 청소하고 출입문도 개방했다. 딸과도 통화했다. 재판부는 아들을 살해한 어머니가 3분여 동안 거실을 청소할 정신적 여유와 이유가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B씨가 소주병 파편에 다친 부위도 수상했다. A씨의 말대로 아들이 쓰러진 뒤 소주병 파편을 치웠다면 위치상 B씨는 다리가 아닌 상체에 상처를 입어야 했다. 표 재판장은 “만약 A씨가 소주병 파편을 치운 후에 신고했다면 B씨가 이날 오전 0시 30분 이전에 가격을 당했을 수 있고 제삼자가 현장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A씨의 진술이 사실과 다르다면 의도적으로 허위진술을 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인천지방법원 전경. 심석용 기자

인천지방법원 전경. 심석용 기자

재판부는 “A씨의 자백과 A씨 딸의 진술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고 검찰이 제출한 나머지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기록과 판결문 내용을 검토한 후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변호사는 “피고인의 자백과 관련 가족의 진술이 있음에도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고 해서 무죄를 선고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그만큼 피고인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재현과정이 부정확해 신빙성이 없다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일 항소심에 간다면 재판부가 피고인의 진술을 다시 들여다보겠지만 1심 재판부가 오래 고민했던 만큼 판결이 바뀔 가능성도 크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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