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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암환자 살려낸 '불멸의 암세포'…70년만에 보상받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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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암세포 '헬라세포' 현미경 관찰 모습. [사진 NIH=위키미디어]

불멸의 암세포 '헬라세포' 현미경 관찰 모습. [사진 NIH=위키미디어]

"불멸(不滅)할 그의 세포는 인류에게 영원히 도움을 줄 것이다."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한 미국 흑인 여성 헨리에타 랙스의 묘비 글이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세포는 70여년간 전 세계 실험실을 떠돌고 있다.

미국 네이처 등 현지언론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하워드휴즈 의학연구소(HHMI)가 그의 이름을 딴 헨리에타랙스재단에 '6자리 숫자'의 기부금을 내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70여년간 그의 세포를 사용한 일종의 대가다.

에린 오셔 HHMI소장은 "헨리에타의 세포가 사용된 것을 인정하고, 그 세포를 부적절하게 획득한 것을 인정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며 "과학·의학이 공평해지기 위해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HHMI는 정확한 보상금액을 밝히지 않았지만 '6자리 숫자'의 기부금은 최소 10만 달러(약 1억1300만원) 이상으로, 헨리에타재단은 이 기부금이 최고액이라고 밝혔다.

헨리에타 랙스.

헨리에타 랙스.

미 볼티모어에 거주하던 31세 랙스는 아랫배 통증을 느끼고, 치료를 위해 존스홉킨스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8개월 뒤 사망했다. 병원은 그를 치료하며 그의 동의 없이 종양에서 세포를 채취해 세포 배양을 연구하는 실험실로 보냈다.

다른 세포는 배양에 번번이 실패했지만, 랙스의 세포만은 계속 살아남아 분열했다. 다른 세포와 달리 그의 세포는 쉽게 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세계 첫 배양에 성공한 인간 세포가 됐다.

그의 이름(Henrietta Lacks)의 첫음절에서 따 '헤라'(HeLa)세포란 이름으로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퍼져나갔다. 다른 세포주에 비해 증식력이 높고, 내성이 있어 과학연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흔하게 쓰인다. 54년 소아마비 백신 개발부터 파킨슨병·암·에이즈 치료제 개발, 유전자지도 작성 등의 연구에 사용됐다.

자신은 이 세포로 사망했지만, 이 세포 덕에 다른 사람은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랙스의 가족들은 아무런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했다. 랙스의 세포가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20년간 몰랐다. 병원에서 그의 세포를 처음 활용할 때 본인이나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랙스의 이야기는 2010년 『헬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이란 책으로 출판되며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이 책 저자인 레베카 스클루트는 "최근까지도 세포 사용에 대해 보상을 한 기관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헨리에타랙스재단을 설립해 이끌고 있다.

HHMI가 기부를 결정한 것은 지난 5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의 체포과정에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한 인종차별 철폐 시위 때문이다. 연구소는 유색인종에 대해 비윤리적으로 수행한 실험을 보상하는 선례를 만들자는 차원에서 이런 기부를 결정했다고 한다.

HHMI의 기부 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HHMI의 연구원을 겸하고 있는 사마라 랙페터슨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교수다. 랙페터슨 교수의 제자들은 올해 초 '과학 분야의 인종차별 해소'를 다루는 방법을 논의했고, 연구실에서 헤라세포를 만들 때마다 일정 금액을 내기로 결정했다.

랙스의 유족인 손녀 제리 랙스 웨이는 "모든 가족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일부 가족들은 이 선물에 감사해 한다"며 "다른 기관들도 뒤따르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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