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발니 쓰러지자…보좌관들은 고무장갑 끼고 호텔방 모였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나발니가 쓰러졌다”

러시야 야권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44)가 8월 20일(현지시간)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쓰러졌을 때, 나발니의 동료 블라들렌 로스 변호사는 톰스크 잰더 호텔 239호에 앉아 있었다. 나발니가 몇 시간 전까지 묵었던 방이었다. 나발니가 중태에 빠졌다는 것밖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스와 동료들은 독극물 테러의 가능성을 직감하고 호텔 방으로 모였다. 증거를 모아야 했다. 이들은 고무장갑을 끼고 방 안의 물품들을 주워담기 시작했다.

알렉세이 나발니. 로이터통신=연합뉴스

알렉세이 나발니. 로이터통신=연합뉴스

4일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나발니에 대한 독극물 테러 공격 당시, 이들이 독극물이 묻은 물병 등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해 진상 규명에 큰 도움을 줬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WP에 사건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당일 오전 10시쯤, 로스 변호사는 나발니가 주도한 ‘반부패재단’ 소속 조사 요원인 게오르기 알부로프, 마리아 페브치흐와 잰더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나발니는 아침 일찍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지만, 이들은 톰스크에 며칠간 더 머무를 예정이었다.

알부로프는 항공기 추적 애플리케이션(앱)을 켜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나발니가 탄 항공기가 모스크바가 아닌 옴스크로 가고 있었다. 알부로프는 나발니의 대변인인 키라 야르미슈에 문자를 보내 “어째서 옴스크냐”고 물었다.

알부로프는 “몇 분이 지났고, 야르미슈는 모든 것이 최악이라며, 알렉세이가 중독돼 의식을 잃었다고 답했다”고 WP에 말했다. 몇 분 후 트위터에는 나발니가 기내에서 괴성을 지르는 장면이 찍힌 영상이 떠돌았다.

알렉세이 나발니. AFP=연합뉴스

알렉세이 나발니. AFP=연합뉴스

나발니는 지난 1일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식은땀이 났다”며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나발니는 승무원에게 “난 중독됐다. 죽고 있다”고 외친 뒤 쓰러졌다.

비슷한 시각, 잰더 호텔에서는 나발니의 동료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나발니가 공항에서 마신 차에 중독됐다’는 주장이 SNS를 떠돌던 때였다. 이때만 해도 이들은 호텔에서 별다른 증거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선 로스 변호사가 239호 문 앞을 지키고 있기로 했다. 이들은 변호사이자 전직 형사인 안톤 티모페예프를 부른 뒤, 호텔 접수처로 향했다. 페브치흐는 호텔 직원에게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인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설득 끝에 호텔 직원은 239호 문을 열어줬다. 오전 11시 45분쯤이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톰스크 잰더 호텔 239호의 모습. 로이터통신=연합뉴스

러시아 시베리아 톰스크 잰더 호텔 239호의 모습. 로이터통신=연합뉴스

이들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영상을 찍으며 239호 안으로 들어갔다. 동행한 호텔 직원은 ‘아무것도 경찰의 허가 없이 가져갈 수 없다’고 했지만, 이들은 무시하고 물병·샴푸 병·수건 등을 챙겼다. 다른 물품은 호텔 직원의 격렬한 반대로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티모페예프는 챙겨온 물품에 각각 라벨을 붙였고, 나발니의 동료들은 차를 타고 265㎞를 달려 오후 5시쯤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다. 옴스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옴스크 병원에서 처치를 받던 나발니는 22일,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독일에 도착해서야 나발니의 동료들은 호텔에 수집했던 증거들을 베를린 병원에 건넸다. 호텔에 있던 물병 겉면에서는 구소련이 1970년대 개발한 신경작용제 ‘노비촉’의 흔적이 발견됐다.

앞서 나발니를 최초로 진료한 러시아 의료진은 나발니에게서 독극물을 확인할 수 없다고 했지만, 지난달 2일 독일 정부는 노비촉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에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와 유럽연합(EU)은 일제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공개 비난하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EPA=연합뉴스

나발니는 지난달 7일 의식을 되찾았다. 같은 달 23일에는 다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호전돼 퇴원했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