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해 박정희 치려했다는 軍대령···끝내 무죄 못 받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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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재판 받는 故 원충연 대령. [중앙포토]

1965년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재판 받는 故 원충연 대령. [중앙포토]

충무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으며 약 15년간 성실하게 군 생활을 해오던 故 원충연 대령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년이 지난 1965년 2월 말 또 한 번의 쿠데타를 모의한다. 육군정훈학교 부교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과장, 육군사관학교 동기생 등 5명이 원 대령과 뜻을 같이했다.

“민주주의 기틀 마련 위해 박정희 체포”

이들의 혁명 이유는 민주주의 기틀 마련이었다. 5‧16 혁명공약은 “민주공화국의 굳건한 토대를 이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로 되어 있다.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필두로 한 제3공화국 정부는 이를 위반해 수립된 정부라고 봤다.

약 두 달 후에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웠다. 거사 일은 박 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인 1965년 5월 16일로 정했다. 이들은 2000명의 포병과 군수학교 병력 400명을 동원해 박 전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의원 등을 체포하기로 했다. 그러나 병력 동원이 어려워져 현실화하지 못했고, 계획이 발각되면서 원 대령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1981년 대통령 특사로 풀려난 원 대령은 당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지향하던 내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원 대령이 2004년 사망한 후 10년 뒤 유족들은 재심을 청구했다. 유족은 “대통령을 체포하는 등의 활동을 계획했더라도 그 목적이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변란의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 “계획 실현될 경우 극도의 혼란 초래”

1965년 반정부혁명 사건으로 재판받는 故 원충연 대령(왼쪽). [중앙포토]

1965년 반정부혁명 사건으로 재판받는 故 원충연 대령(왼쪽). [중앙포토]

그러나 2015년 1심 재판부는 원 대령에게 그대로 유죄를 선고했다. 원 대령 등이 당시 재판에서 한 증언을 토대로 할 때 원 대령에게 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할 목적이 있었음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실제 이와 같은 계획이 실현될 경우 극도의 혼란과 수습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해 대한민국의 기본 질서가 파괴되는 결과가 초래됐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만 1심 재판부는 실제로 폭력적인 활동을 한 것은 아니고, 원 대령이 이 사건으로 불법 체포된 후 상당한 기간 구타와 고문 등을 당한 점을 고려해 징역 17년형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 “함정수사 아니다”

유족은 항소했다. 당시의 모의는 위장 잠입 수사관이 강력히 주동해 시작된 것으로, 함정수사에 당했으니 이로 인한 재판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 원 대령의 행위를 모두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를 연결된 하나의 범죄 행위로 봐야 하는데, 국가보안법과 군형법을 나누어 선고한 건 부당하다고 봤다.

2심 재판부는 함정수사로 보지 않았다. 원 대령이 쿠데타를 결의한 건 2월 말부터였으나 잠입 수사관이 이 자리에 참석한 건 수차 모의를 거듭한 이후인 4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원 대령 등이 병력을 동원해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집단을 구성한 행위는 1개의 행위로 봐야 한다며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상고 모두 기각”…유죄 확정

대법원 3부(재판장 민유숙 대법관)는 이 같은 원심판결에 문제가 없다고 30일 밝혔다. 또 원 대령의 연령, 가족관계, 범행의 동기‧수단과 결과 등을 살펴봤을 때 징역 15년을 선고한 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사형을 선고받았던 원 대령은 자신이 쿠데타를 모의한 지 55년 만에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됐지만 끝내 무죄를 선고받지는 못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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