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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백혈병 아이 기적, 한·일 관계 녹일 전기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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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녹일 훈훈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격심한 양국 간 대치 속에서 한·일 양국이 협력해 백혈병에 걸린 한국 아이를 지난 5일 인도에서 무사히 귀국시켰다고 한다. 이 다섯 살배기는 일본 정부가 자국민을 위해 마련한 특별기를 타고 뉴델리에서 출발, 도쿄에 도착한 뒤 인천으로 왔다.

감정 싸움으로 마스크 지원도 못 해 #교류 확대 위한 투 트랙 접근 바람직

이 사연은 바로 곁의 두 나라가 힘을 모으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새삼 일깨워 준다. 이번엔 일본이 도왔지만 지난 3월엔 한국 정부가 마다가스카르·필리핀·케냐의 교민을 철수시키면서 전세기에 일본인들을 태워줘 귀국을 도왔다. 곧이어 인도·수단에선 일본이 빌린 비행기에 한국인들이 타고 돌아왔다. 이 같은 인도적 차원의 상부상조로 최악으로 떨어진 한·일 관계가 개선될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역설적으로 코로나19는 두 나라가 서로 도울 공간을 마련해 줬다. 교민 철수 과정에서의 협력뿐이 아니다. 코로나19의 질곡에서 막 탈출하려는 한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IT기술을 활용한 방역 노하우를 갖추고 있다. 비록 초기대응엔 미숙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기초과학을 자랑한다. 이런 양국이 힘을 모으면 코로나19 퇴치에 결정적 성과를 낼 수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양국은 자존심 싸움을 벌이며 서로 돕기마저 주저하고 있다. 마스크와 진단키트 제공을 둘러싼 실랑이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 내 코로나19 확산이 진정되면서 정부 일각에서는 여유가 생긴 마스크와 진단키트를 일본에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자 일본 측에서는 이를 대가로 강제징용 문제와 통화스와프 등과 관련, 모종의 요구를 하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고 한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내에서는 “일본 측에서 원하지도 않는데 뭐하러 돕나”라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간에 쌓인 불신으로 이웃 나라에 마스크 하나, 진단키트 하나 지원하지 못하는 게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도 부상병이면 적군이라도 치료해 주는 게 도리다. 하물며 1965년 한일협정 이래 수많은 분야에서 협력해 온 두 나라가 최소한의 도움조차 주고받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비록 강제징용·위안부·독도 등 과거사 및 영토 문제로 일본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지만, 경제·문화 등 비정치적 분야에서는 통크게 협력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 면에서 한·일 문제를 투 트랙으로 접근해 보려는 정부의 전략은 옳은 방향이다.

실제로 두 나라가 힘을 모으면 구체적 성과를 낼 부문이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양국이 대북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경제 분야에선 양국 기업이 동남아·아프리카 등 오지에 함께 진출해 위험을 분산시키는 방안도 장려할 만하다.

특히 코로나19의 최대 피해국인 미국이 중국과의 일전을 벼르고 있어 양국이 공동대처할 일이 생길 가능성도 크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코로나19 확산의 주범으로 몰며 경제적으로 고립시킬 생각이라고 한다. 이런 전략이 어떤 형태를 띨지 지켜볼 일이나 대중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일본이 우리와 같은 입장이라면 보조를 맞추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 큰 사안에 제대로 협력하려면 평소부터 신뢰를 쌓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