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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눈뜬 자들의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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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도시에 전염병이 돈다. 이유도 모르게 사람들이 하나둘씩 앞을 못 보게 된다. 사회 전체가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정부는 비상조치를 내린다. 눈먼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격리한다. 하지만 그곳은 무간지옥(無間地獄)과 같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실종된다. 권력을 지닌 남성들은 먹을 것을 미끼로 힘없는 여성들을 유린한다. 모두 실명 상태가 되지만 오직 한 명, 앞을 볼 수 있는 여인이 주변 사람을 이끌고 수용소를 탈출한다.

코로나·총선 이용한 정치 #시민의 힘으로 이겨내야 #노벨문학상 작가의 일침 #“변질된 기득권 솎아내라”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다. 영화로도 선보여 나름 친숙한 소설이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함께 요즘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물론 코로나19 사태 때문이다. 소설은 묵시론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탐욕을 낱낱이 까발린다. 마지막 대목에서 겨우 희망을 꺼내 들지만 지금 우리가 딛고 사는 곳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잔혹하게 파헤친다.

사라마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4년 뒤 이 도시에 불어닥친 또 다른 재난에 눈을 돌렸다. 바로 『눈뜬 자들의 도시』다. 시력을 회복한 시민들 사이에 불의의 사건이 불어닥치는데, 4년 전 재앙이 ‘신체적 전염병’이었다면 이번에는 ‘사회적 전염병’이다.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2008).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사회 전체로 퍼진다.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했다. [중앙포토]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2008). 실명이라는 전염병이 사회 전체로 퍼진다.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했다. [중앙포토]

작가의 상상력은 민주사회를 떠받치는 선거제도로 확장된다. 지방선거 당일, 이 나라 수도에 유권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나타나지 않는다. 투표 시간을 두 시간 연장해가며 겨우 선거를 마치지만 유효 투표율은 25%에도 못 미친다. 무려 70% 이상이 백지 투표였다.

당국은 1주일 후에 재선거를 치른다. 하지만 결과는 더 황당할 뿐이다. 백지 투표율이 83%까지 치솟는다. 우파든, 좌파든, 중도든, 시민들은 그 어떤 정파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가장 갑갑한 건 그 배경을 짐작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거리에 비밀정보원을 풀어놓는 등 각 부처가 진상 파악에 나서지만 원인, 혹은 발단은 오리무중일 뿐이다. 묘수를 찾아내기 어려운 고난도 수수께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

흑사병이 아닌 백사병이 퍼진 도시, 작가 사라마구는 농담 아닌, 농담 같은 사태를 이렇게 비꼰다. “백지라는 말이 갑자기 외설적인 말이 된 것처럼 입에 오르지 않게 됐다.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 말을 에둘러 갔다. 백지는 빈 종이라 불렀고, 얼굴이 백지장 같다는 그냥 창백하다고 표현했다. 백지수표는 자유수표라고 불렀고, 학생들은 백지상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

주제 사라마구

소설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작가는 현실 정치권에 대한 환멸을 바탕에 깔아 놓는다.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신념과 관행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자기 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라고 썼다. 기득권을 취한 혁명가들, 유권자를 통제하려는 위정자들에 대한 응징을 백지투표로 형상화한 꼴이다. 시민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랄까, 그런 연대감에 실낱 희망을 거는 것 같다.

그 단적인 예가 발등에 불이 난 정부와 달리 시민들이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도를 옮기고, 전철역 폭발사건을 일으키고, 심지어 4년 전 유일하게 시력을 간직한 여인을 배후 조종자로 몰아가지만 시민들은 평온한 일상을 이어나간다. 사재기도 없고, 폭동도 없다. 정부도, 보안부서도, 경찰도 없는 도시이건만 평화가 유지되는 신비한 일이 발생한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현대사회에 대한 거대한 우화다. 비유와 풍자가 섞인 초현실적 세계다. 거짓말과 참말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건 눈앞의 우리 현실 때문이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감염원과 시계 제로의 혼탁한 21대 총선이 중첩되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마저 있다. 때로는 좀비, 또는 강시가 된 느낌이다.

믿을 건 눈뜬 시민들의 양식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백신이다. 침착한 대응으로 바이러스를 잠재워가듯, 편법·꼼수로 얼룩진 총선도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소설처럼 무더기 백지 투표를 던질 순 없지 않은가. 여야 없이 결격·탈법 후보를 찌꺼기 거르듯 체질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그만큼 성숙해졌다. ‘잔인한 달’ 4월이 눈앞이다. 언제나 그랬듯 시민만이 희망이다. 그래야 뜨거운 여름도 맞을 수 있을 터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엄습하는 공포를 피해/함께하는 두려움이 만드는 사랑의 힘으로’ 말이다. (시인 장석의 ‘여름이 온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