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2조짜리 공장 지었는데 '조기 패소'···SK이노, LG화학에 구애 나설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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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화학 - SK이노베이션 소송전 [연합뉴스]

LG화학 - SK이노베이션 소송전 [연합뉴스]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과 벌이는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14일(현지시각) 두 회사 간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판결(Default Judgment)’을 내리면서다. ITC는 LG화학 측이 요청한 조기 패소 판결을 승인하는 ‘예비결정(Initial Determination)’을 내렸다고 이날 밝혔다. 조기 패소 판결은 일종의 예비 판결이다. 다툼의 여지가 많지 않을 경우 소송의 경제성 등을 고려해 사전적으로 내려주는 결정이다. 이번 결정의 구체적인 근거는 추후 공개된다.

LG화학 측은 이날 “SK이노베이션이 ITC 소송 과정에서 악의적이고 광범위한 증거 훼손과 포렌식 명령 위반을 비롯한 법정 모독 행위 등을 저질렀고, ITC가 그에 대해 법적 제재를 내린 것”이라며 “때문에 추가적인 사실 심리나 증거조사를 하지 않고 LG화학의 주장을 인정해 ‘예비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3월 초로 예정된 변론(Hearing) 등의 절차 없이 10월 5일까지 ITC의 최종결정만 남게 됐다.

ITC 홈페이지 조기패소판결 화면 캡쳐.

ITC 홈페이지 조기패소판결 화면 캡쳐.

앞서 LG화학은 지난해 11월 5일 ITC에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인멸했다며 조기 패소 판결을 요청한 바 있다.
이대로 ITC 위원회에서 ‘최종결정’을 내리면 LG화학의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ㆍ모듈ㆍ팩 및 관련 부품과 소재해 대한 미국 내 수입 금지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LG화학의 전기차용 배터리. [사진 LG화학]

LG화학의 전기차용 배터리. [사진 LG화학]

SK이노베이션의 미국 조지아 공장에서 생산한 물량도 그 적용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결정문이 공개되지는 않은 상태여서, 어느 제품이 얼마만큼 제약을 받게 될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3월 미국 조지아주에 1조9000억원을 들여 독일 폴크스바겐 등에 납품할 9.8GWh급 1공장을 짓고 있다. 이 회사 김준 사장은 올해 초 1공장 외에도 이와 비슷한 규모의 2공장 추가 증설 계획을 밝혔었다. 1·2공장의 투자 규모를 합치면 약 3조원에 달한다.

한ㆍ미 양국서 6건 소송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소송전은 지난해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G화학은 미국 ITC와 델라웨어주 연방 법원에 영업비밀 침해를 이유로 SK이노베이션을 제소했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핵심 인력과 기술을 빼갔다”고 주장했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인력과 기술을 빼가지 않았다”며 맞섰다. 지난해 9월에는 양사 최고 경영자가 만났으나 합의를 끌어내진 못했다. 두 기업 모두 배터리를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결정하고, 조 단위 투자를 이어가는 만큼 쉽게 물러설 수 없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었다.

LG화학-SK이노베이션 간 소송 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LG화학-SK이노베이션 간 소송 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두 회사는 현재 한ㆍ미 양국에서 총 6건의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ITC의 최종 결정은 미국 델라웨어주 연방 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사소송과 국내 경찰 수사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해 9월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이노베이션 본사 등을 압수 수색을 하는 등 영업비밀 침해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ITC의 조기 패소 판결이 SK이노베이션이 그간 계획해 온 배터리 관련 사업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 나온다. 세계 최대의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인 미국에서 ‘발목을 잡힌 채로’ 사업에 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LG화학-SK이노베이션 간 소송 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LG화학-SK이노베이션 간 소송 현황.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 역시 이 소송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소송 결과에 따라 공급선 자체가 달라질 수 있어서다. 참고로 1996년부터 지난해까지 영업비밀 침해 관련 소송의 경우 ITC의 행정판사가 침해 여부를 인정했던 예비 결정이 최종 단계에서 뒤집힌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LG화학-SK이노 간 극적 합의 가능할까

반전의 여지도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12월 “미국 내 배터리 생산 공장을 늘리고 싶어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SK이노베이션에 관대한 결론이 나길 원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배터리 소송은 결국 거부권을 가진 미 무역대표부(USTR) 선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ITC 소송 결과에 미국 행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물론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측이 극적인 합의를 통해 법 절차를 잘 마무리할 수도 있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이번 예비 결정에 따라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SK이노베이션 측은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 이와 관련 LG화학 측은 “이번 소송의 본질은 30여년 동안 축적한 소중한 지식재산권을 정당한 방법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남아있는 소송 절차에 계속해서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임할 것이며,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 측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화를 통한 상황 해결도 가능하단 의미로 해석된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이날 낸 입장문에서 "ITC로부터 공식적인 결정문을 받아야 구체적인 결정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우리 주장이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결정문을 검토한 후, 향후 법적으로 정해진 이의절차를 진행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어 “LG화학과는 선의의 경쟁 관계지만,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기조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관련 원민석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조기 패소 판결은 시장에서 어느 정도 예상하던 상황”이라며 “단기적으로 SK이노베이션 주가가 약세일 수 있지만, 배터리 시장이 계속해서 커지는 상황인만큼 중장기적인 영향은 지켜봐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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