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살해 치매노인’ 법정 대신 병원에서 선고···‘치료적 사법’ 첫 적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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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의 한 병원에서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가 아내를 살해한 A씨에게 대한 선고 공판을 열었다. [법원 기자단 제공]

경기도 고양시의 한 병원에서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가 아내를 살해한 A씨에게 대한 선고 공판을 열었다. [법원 기자단 제공]

“현실에 수긍하겠습니다.”

아내를 살인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68)씨가 최후진술에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냐”는 아들의 질문에는 짧게 “법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날 A씨에게 재판부는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A씨가 생각한 것과 달리 A씨의 선고 공판은 법원에서 열리지 않았다.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의 항소심 선고 공판을 10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의 한 병원에서 진행했다. A씨는 간호사가 끄는 휠체어에 앉아 병원 내의 작은 방에서 재판부를 마주했다. 재판장과 1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수의 대신 환자복을 입은 A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응시했다.

아내 살해 이후 치매 증상 악화···범행 사실 기억 못 해

2018년 12월 A씨는 아내를 수차례 때리고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치매를 앓고 있던 A씨는 심신상실을 주장했지만 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됐다.

이후 A씨의 상태는 악화됐다. 구치소에 면회를 온 딸에게 “엄마(사망한 아내)와 왜 동행하지 않았느냐”고 꾸짖는 등 자신의 범행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피해자의 유족이면서 동시에 피고인의 가족이기도 한 A씨의 자녀들은 “초고령화 사회에 나 또는 내 가족들도 걸릴 수 있는 치매 가지고도 안전한 환경에서 소통하며 존엄 지킬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며 법원에 탄원했다.

치료적 사법, 처벌이 아닌 문제 해결 지향이 목적

A씨와 검사 측 모두 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했다. A씨의 사건은 정준영 부장판사가 이끄는 서울고법 형사1부에 배당됐다. 정 부장판사는 ‘치료적 사법’의 주창자다. 치료적 사법이란 법원이 개인에 대해 유·무죄 판단을 내리고 처벌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개념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에서도 정 부장판사는 올바른 처벌보다 올바른 해결책을 고민해보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삼성에 ‘준법감시위원회’를 꾸리도록 하고, 이 부회장의 형량을 정하는데 이를 반영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준법감시제도 정착을 통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계기를 만들어보겠다는 취지다.

정 부장판사는 A씨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봤다. 정 부장판사는 “치료를 위해 구속을 풀어 치매 전문병원에서 치료받도록 한 후 재판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며 지난해 9월 A씨를 보석으로 석방했다. 법원이 치매 환자에게 치료적 사법을 목적으로 보석을 허가한 첫 사례다. A씨는 집이 아닌 요양병원에서 5달을 보냈다. 담당의와 A씨의 가족은 치료경과를 매일 관찰했다. 보석준수조건 보고서도 매주 제출했다. 이날 재판부는 이런 자료를 토대로 병원에서 선고를 내렸다.

재판부 “계속적인 치료, 인간적 존엄·가치 중시하는 헌법과 일치”

검찰 측은 “A씨의 인지기능이나 판단능력은 고려해야 하지만 구체적인 운동능력에서는 새로운 피해자를 발생시킬 수 없을 정도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1심과 마찬가지로 12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이사건 범행은 범행수법이 잔혹하고 결과가 중대하여 엄한 처벌이 마땅하다”면서도 “계속적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선언한 헌법과 조화를 이루는 결정”이라고 판단해 A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다만 집행유예 기간에 보호관찰을 받으며 치료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A씨의 주거지는 치매 전문병원 등으로 제한됐다.

‘치료적 사법’ 첫 적용 사례···앞으로 확산될까

이로써 A씨는 치료적 사법의 첫 적용 사례가 됐다. 비슷한 사건에 이 같은 치료적 사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A씨의 변호를 맡은 김선옥 국선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법원, 검찰, 피고인의 가족들 그리고 치료병원의 적극적 협조와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전향적 판례라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어 “치료적 사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각 기관의 적극적 노력과 협조가 필요한 만큼 유사 사건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치료법원과 같은 제도가 정비돼 활성화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백희연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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