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다]"메르스 발생지 안 갔다" 검역 미룬 정부 1000만원 배상, 코로나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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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 설치된 신종 코로나비이러스 감염증 선별진료실에서 의료진이 체온계를 들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4일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 설치된 신종 코로나비이러스 감염증 선별진료실에서 의료진이 체온계를 들고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보건 당국의 잘못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우한 폐렴)에 감염된 환자는 국가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낼 수 있을까요.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이라 불린 메르스 사태 뒤에도 "정부의 과실로 메르스에 걸렸다"며 3차 감염자와 사망한 감염자의 유가족들이 국가에 배상을 청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법조계에선 이 판결이 '신종 코로나'와 관련한 향후 국가 배상소송의 기준이 될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같은 감염, 서로 다른 판결

2016년 5월 중순 16번째 메르스 확진자(16번 환자)와 같은 병원에 있다 메르스에 걸린 30번 환자(완치) 이모씨와 38번 환자(사망) 오모씨의 유가족은 같은해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합니다. 흥미로운 건 감염인자(16번 환자)가 같았던 두 환자의 소송 결과가 정반대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지난해 3월 14일 대법원 1부는 두 사건에 대한 확정판결을 동시에 내렸습니다. 30번 환자는 일부 승소해 국가로부터 1000만원을 받았고, 38번 환자의 유가족은 모두 패소해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법원은 두 사건에 대해 왜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을까요. 재판부는 두 환자가 메르스에 감염된 시기에 주목했습니다. 국가 과실과 메르스 감염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엄격성 판단도 재판부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법원은 과거 판례에 따라 "질병관리본부가 메르스에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인정되거나 경험·논리상 도저히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기준도 제시했습니다. 참고로 30번 메르스 환자에 대한 국가 배상을 인정한 판사는 현재 정경심(58) 동양대 교수 재판을 맡은 송인권(51·연수원 25기) 부장판사입니다.

메르스 30·38번 환자 유가족 국가 손해배상 소송 경과. 그래픽=신재민 기자

메르스 30·38번 환자 유가족 국가 손해배상 소송 경과. 그래픽=신재민 기자

30번 환자의 재판부는 대전 A병원에 입원한 이씨가 5월 25일 같은 병원에 있던 16번 환자를 통해 메르스에 감염됐다고 추정했습니다. 반면 38번 환자 재판부는 대전 A병원에 입원한 오씨가 5월 22일 16번 환자를 통해 감염됐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환자의 감염 시기엔 3일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두 재판부는 각 환자의 메르스 확진 날짜에서 잠복기(5일)를 빼서 감염날짜를 추정했습니다. 1번 환자를 통해 메르스에 감염된 16번 환자는 5월 22일 38.5도의 고열이 지속되자 A병원에 5월 22~27일까지 입원해 있었습니다.

2015년 5월 17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세종시 보건복지부 중앙 메르스 관리대책본부를 방문해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장관과 메르스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5년 5월 17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세종시 보건복지부 중앙 메르스 관리대책본부를 방문해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장관과 메르스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가의 과실은 인정하다 

30번 환자의 손을 들어준 재판부는 '1번 환자에 대한 질본의 메르스 진단 지연→1번 환자에게 감염된 16번 환자에 대한 추적 지연 및 격리 실패→16번 환자의 A병원 입원 및 30번 환자 메르스 감염' 간에 인과관계가 명확하며 국가의 과실이 현저하다고 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재판부가 추정한 감염시기(5월 25일)입니다. 당시 질본은 1번 환자가 방문한 바레인이 메르스 발생 국가가 아니란 이유로(발생 국가의 인접국가임에도) 1번 환자에 대한 삼성서울병원과 강남구 보건소의 1차 메르스 진단검사 요청을 이틀 가까이 미뤘습니다.

재판부는 삼성서울병원의 요청 즉시 질본이 1번 환자의 검체를 채취했다면 1번과 16번 환자가 머물던 평택 B병원의 접촉자 범위가 19일엔 결정되고, B병원에 머물던 16번 환자를 5월 22일 낮까지는 추적해 격리해 30번 환자와의 접촉을 막았을 것이라 봤습니다. 30번 환자의 감염 추정 시기가 5월 25일이니 3일의 여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판결이 공통 인정한 국과 과실. 그래픽=신재민 기자

두 판결이 공통 인정한 국과 과실. 그래픽=신재민 기자

재판부는 1번과 16번 환자가 머물던 평택 B병원에 대한 질본의 역학조사도 부실했다고 했습니다. 당시 질본은 1번 환자와 같은 병실을 쓴 환자와 의료진만 밀접 접촉자로 판단했습니다. 질본은 다른 병실에 있던 6번 환자의 확진 판정이 난 뒤에야 16번 환자를 뒤늦게 추적했습니다. 재판부는 "도저히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부실한 역학조사였다"며 질본을 질타합니다. 재판부는 설령 1번 환자에 대한 진단이 지연됐더라도 B병원 역학조사만 잘 됐다면 16번 환자가 5월 24일까진 추적·격리됐을 것이라 봤습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따져본 것입니다.

과실은 있지만 인과관계는 부족

질본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38번 환자 유가족의 재판부는 30번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1번 환자에 대한 메르스 진단 지연, B병원에 대한 질본의 부실 역학조사는 국가의 과실이라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실과 오모씨의 사망간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30번 환자 재판부와 달리 없다고 봤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진원지인 중국 후베이성 우한과 인근 지역에서 2차로 철수한 교민과 유학생을 태운 버스가 1일 오전 수용 시설인 충남 아산 경찰 인재개발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진원지인 중국 후베이성 우한과 인근 지역에서 2차로 철수한 교민과 유학생을 태운 버스가 1일 오전 수용 시설인 충남 아산 경찰 인재개발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38번 환자 재판부는 5월 18일 1번 환자에 대한 진단이 바로 이뤄졌다면 5월 21일(감염은 22일)에는 16번 환자를 추적했을 수 있다는 전제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16번 환자에게 메르스 증상이 현저히 나타나지 않았고 입원도 안 했었다며 21일보다 오랜 시간 후에 추적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또한 당시 메르스 지침에 따르면 밀접 접촉자의 범위가 환자의 2m내로 한정돼 B병원에 대한 역학조사가 철저하게 이뤄졌더라도 16번 환자는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습니다. 38번 환자의 5월 22일 메르스 감염은 막기가 쉽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때 지침의 문제 여부를 떠나 질본 역학조사관들은 따를 수밖에 없던 기준이란 것입니다.

38번 재판부는 당시 정부의 메르스 관련 병원명 공개 지연 등에 대해서도 "환자의 사망과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30번 재판부 보다 국가의 과실과 메르스 감염간의 인과관계를 더 엄격하게 본 것이죠.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당시 메르스 사태에 대한 재판부별 사실과 인과관계의 판단이 일부 달랐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 현직 판사는 "두 환자의 발병시기가 달라 서로 모순되는 판결로 보긴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성동구 보건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 의료시설 보고를 듣던 중 안경에 김이 서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성동구 보건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응 의료시설 보고를 듣던 중 안경에 김이 서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국가 책임 입증 쉽지 않아  

법무부에서 근무하며 국가 소송 등에 관여했던 고검장 출신 변호사는 "국가 배상 소송은 국가의 고의와 중과실을 입증해야 해 원고의 승소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국가 배상의 기준이 중과실인 이유에 대해 또다른 검사 출신 변호사는 "그 기준이 아니라면 국가는 시민들의 소송에 파산할 것"이라 답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변호했던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도 "세월호 구조의 경우 국가의 과실이 명백해 유가족들이 배상 소송에서 이겼지만 메르스나 신종코로나는 사안별로 법원의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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