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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한국 국호 인정 않으면 손님이 주인 따귀 갈기는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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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0〉 

쭤창런은 도박과 투기로 보상금을 탕진하자 병원 부원장 아들을 유괴, 살해했다. 1997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집행은 민진당 집권 초기인 2000년에 했다. [사진 김명호]

쭤창런은 도박과 투기로 보상금을 탕진하자 병원 부원장 아들을 유괴, 살해했다. 1997년 사형선고를 받았다. 집행은 민진당 집권 초기인 2000년에 했다. [사진 김명호]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 오후에 발생한 중국민항기 춘천 불시착은 적당한 시기에 날아온 복덩어리였다. 최초의 공중납치 사건이다 보니 급한 쪽은 중국이었다. 밤 9시 10분, 도쿄의 중국민항 총경리가 베이징에 전문을 보냈다. “승객과 승무원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서울로 갈 예정이었으나 시간 관계상 춘천 시내의 소양(昭陽)관광호텔과 세가(世家)여관에 수용했다. 무장 경찰이 겹겹이 배치되는 등 경비가 삼엄하다. 기자 출입도 불허한 상태다. 일본인 탑승객 3명은 일본대사관에서 인수했다.”

민항국장, 담판 단장으로 서울에 #한국 정부는 레드 카펫 깔고 예우 #우리측 단장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 #각서 서명란에 명기할 국호 갈등 #한·중 국기도 내걸지 않고 서명식 #납치범 6명은 재판 후 대만 추방

그간 있었던 상황도 적혀있었다.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와 대만 대사관 무관이 폭도들과 담판했다. 결과는 확인 중이다. 탑승객인 동북공정학원 교수와 항공공업부 간부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갈 것을 분명히 하고 납치범들의 징벌과 승객의 안전을 바라는 내용에 승객 전원이 서명했다. 납치범 6명은 한국 관원들이 데리고 갔다. 저녁은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에서 만든 군만두 200인분으로 해결했다. 한국 측의 배려가 기대 이상이다.”

기장 “구름 위서 납치당해 남조선 왔다”

납치범들을 대만으로 보내라고 시위하는 화교와 반공인사. 1983년 8월, 서울. [사진 김명호]

납치범들을 대만으로 보내라고 시위하는 화교와 반공인사. 1983년 8월, 서울. [사진 김명호]

민항총국은 항공기 기장과 연락을 시도했다. 국장 선투(沈圖·심도)가 산만한 회고를 남겼다. “도쿄, 뉴욕, 런던, 홍콩의 중국 대사관과 중국민항 지사에서 춘천의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받건 안 받건 계속 걸어댔다. 도쿄에서 걸려온 전화에 여관 주인이 인심을 썼다. 중국 여행객과 비행기 승무원 모두 안전하고 건강하다는 말만 하고 툭 끊었다. 우리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기장 왕이셴(王儀軒·왕의헌)은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이었다. 승객들에게 당부했다. “우리는 구름 위에서 납치당해 남조선까지 왔다. 행동통일이 시급하다. 신분이 특수하거나 국가기밀에 접근했던 사람은 신분증을 폐기해라. 중요 문건이 있으면 지금 제출하기 바란다. 화물칸에 따로 보관하겠다. 서로 관심 갖고 돕기를 당부한다. 여자 승객 5명은 항상 같이 행동해라.”

5월 6일 새벽 3시, 신화사 총편집이 국제부 당직실에 전화를 걸었다. “중앙에서 민항국장 선투가 인솔하는 담판단의 서울 파견을 결정했다. 외교부와 공안부, 신화사 등 관계기관이 참여한 중국민항 공작조를 꾸렸다. 남조선에 가서 국내 연락과 취재를 겸해라. 보고문은 도쿄 신화사를 거쳐 중난하이(中南海)와 신화사 본사에 영문으로 작성해서 보내라.” 날이 밝자 공작조 9명과 항공 기술자 24명은 출국 준비에 분주했다.

서명 후 선투와 악수하는 한국 측 대표단 단장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 1983년 5월 10일 오전, 서울. [사진 김명호]

서명 후 선투와 악수하는 한국 측 대표단 단장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 1983년 5월 10일 오전, 서울. [사진 김명호]

6일 오후, 1950년대 중반부터 외교부에서 북한 문제를 담당하던, 아주사(亞洲司) 조몽처(朝蒙處) 부처장도 공작조에 합류했다. 한중 수교 후 부산 총영사를 역임한 부처장은 훗날 생생한 구술을 남겼다. “공작조는 회의를 거치지 않았다. 조원들도 비행장에서 대면했다. 나는 조선어 공부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선학이었다. 조선어는 한국어와 달랐다. 한국에 관한 지식도 일본에서 발간되는 통일신문에서 본 것이 다였다. 한국이 어떤 곳인지,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내 임무는 승객과 비행기를 무사히 중국으로 데려오는 것이었다. 상대가 어느 부서인지도 몰랐다. 공식 직함은 중국민항 통역이었다.”

김포공항에 마중 나온 최고 관원은 외무부 차관보였다. 선투는 차관보가 어느 정도 직급인지 물었다. 조몽처 부처장도 몰랐다. 뒷머리만 긁어댔다. 중국도 준비하기는 했다. 국장의 비서가 큰 상자를 끼고 다녔다. 승객들의 식사와 숙박, 환자 치료, 항공기 수리에 쓸 미화 20만 달러가 들어있었다.

중국민항 35주년 기념식을 주관하는 선투(왼쪽 둘째). 왼쪽 첫째가 민항기 사건을 총지휘한 구무. 오른 둘째는 총리 리펑. [사진 김명호]

중국민항 35주년 기념식을 주관하는 선투(왼쪽 둘째). 왼쪽 첫째가 민항기 사건을 총지휘한 구무. 오른 둘째는 총리 리펑. [사진 김명호]

조몽처 부처장은 한국 측의 의전에 혀를 내둘렀다. “남조선 영공에 들어서자 전투기 2대가 우리 전용기를 호위했다. 선투 국장은 붉은 카펫을 통해 귀빈실로 들어갔다. 닉슨이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중미 양국은 미수교 상태였다. 미국 대통령이라도 붉은 카펫을 깔지 않았다. 호텔로 가는 승용차에 외무부 아주 국장이 내 옆에 동승했다. 운전석 옆에 앉은 사람이 중국과 과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국장은 통역인 내게 외교 문제를 거론했다. 내 신분을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국장은 계속 말을 걸었다. “우리 두 나라가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오면서 느꼈을 줄 안다. 역사를 보면 왕래가 그친 적이 없다. 현재 상황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느냐?” 통역이 답할 질문이 아니었다. 계속 묻자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열었다고 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이번 일로 물이 생겼다. 저수지를 이뤄야 한다. 익은 과일은 저절로 떨어진다. 자연의 법칙에 맡기자.”

협상은 납치범 인도와 국호 사용 외에는 순조로웠다. 한국 측은 〈헤이그공약〉을 거론했다. “비행기는 착륙한 국가에 형사 관할권이 있다”며 납치 주범 쭤창런(卓長仁·탁장인) 등 6명의 인도를 거부했다. 선투는 노련한 협상가였다. 승객과 항공기의 무사귀환이 우선이었다. 한국과 대만 관계도 고려했다. “일단 유보시키자”며 얼버무렸다.

총리 저우언라이(앞줄 중앙)는 선투를 중국의 날개라 부르며 신임했다. [사진 김명호]

총리 저우언라이(앞줄 중앙)는 선투를 중국의 날개라 부르며 신임했다. [사진 김명호]

5월 8일 밤, 한국 측이 협상 결과 초안을 중국 측에 전달했다. 신화사와 외교부 관원이 선투에게 훈수를 뒀다.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협의(agreement)라는 명칭은 곤란하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9번 등장하고 서명란에 중화인민공화국을 명기했다. 우리는 남조선을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다.”

5월 9일, 격론이 벌어졌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한국 대표단 단장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바꿨다. “중국대표단은 우리 정부의 동의를 받아 서울에 온 손님이다. 주인의 국호를 승인하지 않는 것은 손님이 주인의 따귀를 갈기는 것과 같다. 내 성이 공(孔)가다. 예절과 겸양(禮讓)을 강조한 공자의 후예다.”

중국민항 공작조가 절충안을 짜냈다. 협의를 각서 내지는 비망록(memo-randum)으로 바꿨다. 초고에 사용한 대한민국도 ‘남조선당국’이나 ‘서울’(漢城)로 수정했다. 서명란에만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명기했다. 선투는 국호 옆에 중국민항총국 도장을 찍었다.

양국 협상단 일진일퇴 공방 끝에 타협

5월 10일 오전 10시, 서명식이 열렸다. 양측은 국기를 내걸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사이에 공간을 두지 않았다. 오후 3시 45분, 중국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전용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9년 후, 한중 양국은 정식으로 수교했다. 중국은 남조선 대신 한국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탈취범 6명은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대만으로 추방됐다. 대만은 6인의 반공투사가 자유를 찾아왔다며 들썩거렸다.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 접견은 물론, 정착금도 300만 달러씩 받았다. 한동안 대만은 항공기 납치범들의 천국이었다. 1993년까지 10여대가 날아왔다. 대만은 정책을 바꿨다. 승객과 비행기를 대륙으로 보내고, 탈취범들은 엄하게 다뤘다. 실형을 선고하고, 복역을 마치면 대륙으로 추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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