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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연 찾아오는 기분으로 납치 민항기 대책 세워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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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9〉

중국민항기 납치사건 3개월 후, 중국 공군 대교(大校) 쑨텐친(孫天勤)이 미그 21기 몰고 한국으로 왔다. 정부는 대만에 가겠다는 쑨의 요구를 들어줬다. 대만 공군에 편입된 쑨은 황금 7000냥을 받았다. [사진 김명호]

중국민항기 납치사건 3개월 후, 중국 공군 대교(大校) 쑨텐친(孫天勤)이 미그 21기 몰고 한국으로 왔다. 정부는 대만에 가겠다는 쑨의 요구를 들어줬다. 대만 공군에 편입된 쑨은 황금 7000냥을 받았다. [사진 김명호]

1983년 5월 5일, 다롄 상공에서 납치당한 중국 민항기의 춘천 불시착은 한·중 관계가 미묘할 때 발생했다.

중국민항 대책반 이끈 구무 부총리 #민항국장 선투에게 신속 대응 지시 #선투 “한국에 가 담판하는 게 상책”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해외서 한국 외교관과 사귀지 말라” #서울올림픽 유치 계기로 족쇄 풀어

신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 전부터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충돌이 있어도 오래가지 않았다. 한국과는 선을 그었다. “해외에서 한국 외교관과 사귀지 말라”는 명확한 규정이 있었다.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대화는 물론이고 눈인사나 악수도 나누지 마라.” 한국도 큰 차이 없었다.

한국, 나포 중국어선 본토로 송환

선투(오른쪽 첫째)는공군 사령관 양청우(楊成武·왼쪽 첫째), 총정치부 주임 사오화(蕭華·왼쪽 둘째) 등과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선투(오른쪽 첫째)는공군 사령관 양청우(楊成武·왼쪽 첫째), 총정치부 주임 사오화(蕭華·왼쪽 둘째) 등과 자주 어울렸다. [사진 김명호]

1970년 봄, 한국 해역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조업 중인 중국어선 1척을 한국 해경이 풀어줬다. 평소 대만으로 보내던 것과는 다른 조치였다. 보고를 받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한국의 중국에 대한 태도가 변할 징조라고 판단했다. 재외 공관에 “한국 외교관들의 눈길에 조심스럽게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8년 겨울, ‘중국공산당 11차 중앙위원회 3번째 회의(三中全會)’를 계기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론이 중국의 현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중국 전직 외교관의 구술을 소개한다. “79년 9월 21일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올림픽 유치 계획안에 서명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놀랐다. 3주 후 세상을 떠나자 흐지부지될 줄 알았다. 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서울이 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됐다. 대기업인의 공로가 컸다는 정보에 경악했다. 일은 기업인들이 하고 공치사는 정부가 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춘천에 불시착한 중국민항기 납치 사건도 한국의 항공사 대표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원만히 해결됐다. 명칭만 보면 국영항공사 같았지만 민간 항공사였다.”

외교부의 동아시아 문제 실무자들은 한국의 발전속도가 빠른 것에 주목했다. 한국관계를 느슨히 할 필요가 있다고 중앙에 건의했다. 대만이 끼어들 틈이 많다 보니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할 형편은 못됐다. 해외 공관원들에게 간단한 전문만 발송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한국 외교관 만나면 악수도 하고 대화 몇 마디 주고받아도 무방하다. 명함 교환과 사적인 만남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한국 외교관들이 접촉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

사건 해결을 지휘한 구무(가운데). 오른쪽은 중공 개국원수 네룽쩐(聶榮臻). 왼쪽이 중공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사진 김명호]

사건 해결을 지휘한 구무(가운데). 오른쪽은 중공 개국원수 네룽쩐(聶榮臻). 왼쪽이 중공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사진 김명호]

신화통신사(新華通新社) 홍콩분사(香港分社) 사장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의 회고록에 당시 중국의 방침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파티에서 한국 총영사가 다가왔다. 악수 청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 기색이었다. 나는 받기만 했다. 명함이 떨어져 미안하다고 얼버무렸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쉬자툰은 난징군구(南京軍區) 서기와 장수(江蘇)성 서기를 역임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었다. 다들 홍콩의 지하총독이라 불렀다. 국내 직함이 홍콩 마카오 서기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중국민항 296호기 납치 확인 3분 후, 중국 정부는 긴급 대책반을 가동시켰다. 조장이 개혁개방의 야전사령관 격인 부총리 구무(谷牧·곡목)였다. 구무가 민항국장 선투(沈圖·심도)에게 지시했다. “너는 항일군정대학 시절부터 연(鳶)날리기에 능했다. 대회에서 일등만 했다. 도둑맞은 연 찾아오는 기분으로 온갖 지혜 짜내서 대책을 강구해라. 승객과 승무원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 의견이 있으면 말해라.” 선투가 입을 열었다. “현장에 가는 것이 상책이다. 그간 우리는 북한만 인정했다. 남한과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항미원조 이후 형성된 적대관계가 아직도 계속 중이다. 납치된 항공기에는 일본인 탑승객이 3명 있다. 춘천 공항은 미군 공항이다. 외신 보도를 분석해 보면 일본과 미국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우리가 직접 한국과 담판에 나서야 한다. 한국도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다. 한국 측에 우리 의견을 전달할 방법을 찾아보겠다.”

선투는 간부들을 소집했다. “국제회의에서 한국인에게 받은 명함 중 항공 관련자가 있는지 찾아봐라.” 간부 한 명이 대한민국 교통부 항공국장의 명함을 제출했다. 하단에 팩스 번호가 있었다. 중국민항 도쿄 지사를 경유해 팩스를 보냈다. “금일 오후 폭도들에게 납치당한 중국민항 항공기가 귀국 춘천공항에 착륙했다. 원만한 처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서울에 협상단을 파견하겠다. 협조를 청한다. 중국민항총국 국장 선투.”

중국, 협상단 서울 파견 제의 수용

1983년 4월 25일, 대만 육군 소교리다웨이(李大維)가 정찰기 몰고 대륙에 귀순했다.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만 열흘 후 민항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재미는 못 봤다. [사진 김명호]

1983년 4월 25일, 대만 육군 소교리다웨이(李大維)가 정찰기 몰고 대륙에 귀순했다.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만 열흘 후 민항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재미는 못 봤다. [사진 김명호]

대만도 가만있지 않았다. 행정원이 성명을 발표했다. “반공 의사(義士) 6명이 자유를 찾아 대만으로 향하던 중, 한국 춘천의 미군 공항에 착륙했다. 우리 측과 면담을 요구했지만, 한국과 미군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유 세계로 오기를 갈망하는 반공 의사와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교부와 국방부가 특사를 파견할 예정이다.” 일본도 끼어들었다. “피랍 항공기에 일본국민 3인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를 승인한 적이 없다. 양국이 원하면 일본이 주선에 나설 용의가 있다.”

5월 6일 오전, 구무가 당 중앙 대표 자격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정황 보고를 받은 후 입을 열었다. “서울에 협상단을 파견하면 사태 수습이 가능할지, 여러 각도로 분석했다. 현재 남조선 당국은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 중이다. 우리가 손을 내밀면 뿌리칠 리가 없다. 서울에 협상단을 파견하겠다. 준비에 만전을 기해라.” 회의 도중 도쿄의 중국민항이 한국 소식을 전했다. “남조선 당국이 긴급 각료회의를 열었다. 정오에 중대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탑승객들은 오전 8시에 춘천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상처 입은 승무원 2명도 서울의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방송을 기다렸다. 정오 직전 대한민국 항공국장의 답전이 도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국장 선투선생; 전문 받았다. 의견을 수용한다. 기상조건이 열악하고, 항공편이 번잡하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5월 7일(토요일), 한국시간 12시 30분 김포 국제공항에 도착할 것을 건의한다. 우리측에서는 외교부가 안건을 처리한다. 귀국 외교부 고위급이 함께 오기를 강력히 건의한다.”

국무원이 회의를 소집했다. 대표 선정 놓고 한차례 토론이 벌어졌다. 듣기만 하던 구무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돌아와서 결론을 내렸다. “당 중앙과 국무원은 선투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중국민항 공작조를 조직해라. 외교부와 공안부, 신화사 등 관계기관에서 한 명씩 차출하되 서로 친분이 있는 사람은 배제해라.” 북한도 의식했다. “협의서를 주고받을 때 국호 사용은 신중을 기해라. 부득이 한 경우 비망록으로 대체하되 중국민항을 명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 도장을 찍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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