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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통일을 위해 왔다”…쉬자툰 한마디에 홍콩이 발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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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1〉

1983년 6월 30일 오후, 홍콩에 도착한 쉬자툰. 진한 색안경과 허름한 복장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 김명호]

1983년 6월 30일 오후, 홍콩에 도착한 쉬자툰. 진한 색안경과 허름한 복장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상하이에서 춘제(春節)를 보내곤 했다. 1983년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이에서 푹 쉬고 춘제 기간이 끝나자 가족들과 쑤저우(蘇州)로 이동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둘째 부인 천제루(陳㓗如·진결여)의 사저를 개조한 초대소에 머무르며 유유자적했다. 업무는 거의 보지 않았다. 당시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은 장쑤성(江蘇省) 제1서기였다. 덩샤오핑에게 현지상황을 설명하고 싶었다. ‘덩샤오핑 판공실’ 주임에게 시간을 안배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임은 20분을 초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27년간 장쑤성서 근무한 지방관리 #덩샤오핑 만나 시장의 중요성 강조 #후야오방 “그는 개방적 공산주의자” #신화통신사 홍콩 분사장으로 임명 #‘특수한 인물·임무’에 세계가 관심

쉬자툰은 27년간 장쑤성 서기와 성장, 난징군구(南京軍區) 정치위원을 역임한, 전형적인 지방관리였다. 면담이 잡히자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겠냐고 판공실 주임에게 물었다. “진부한 내용은 싫어한다. 노인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좋아한다”는 대답에 안심했다.

덩샤오핑 “네 말이 맞다, 시장이 중요하다”

1964년 만추(晩秋), 난징군구 사령관 쉬스요(許世友·오른쪽)와 함께 마오쩌둥을 맞이하는 정치위원 쉬자툰(왼쪽). [사진 김명호]

1964년 만추(晩秋), 난징군구 사령관 쉬스요(許世友·오른쪽)와 함께 마오쩌둥을 맞이하는 정치위원 쉬자툰(왼쪽). [사진 김명호]

덩샤오핑은 듣기만 했다. 가끔 하는 질문도 쉬자툰이 하고 싶은 말들이었다. 장쑤성이 다른 곳에 비해 성장 속도가 빠른 이유를 물었다. 쉬자툰은 주변 상황을 설명하며 자신의 경험을 곁들였다. “문혁시절 4년간 추방당했다. 무슨 과오가 있었는지 진지하게 분석했다. 간부들에게 법과 원칙을 지키라고 강조하면서 내가 어긴 적이 많았다. 오만 때문이었다. 그런 범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새기고 새겼다. 그간 시장(市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다. 시장은 서로 경쟁하며 규정과 원칙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성 정부가 지역별로 통제와 자율을 실시했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둔 곳이 효과가 있었다. 다른 간부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복권되자 금세 까먹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 비해 반성 기간이 긴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은퇴가 임박한 것이 다행이다.” 덩샤오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시장이 중요하다”며 씩 웃었다.

얘기가 끝날 무렵 덩샤오핑이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상하이(上海)와 저장(浙江)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쉬자툰은 덩샤오핑이 자신의 관점에 수긍한다는 생각이 들자 대담해졌다. “상하이는 기초가 단단하다. 사고만 해방시키면 무슨 일이건 해낼 수 있는 곳이다. 저장과 산둥(山東)은 우리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야 우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산둥은 우리보다 조건이 좋다.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우리 장쑤성을 능가할 날이 머지않았다.” 판공실 주임이 저녁 먹을 시간이 됐다며 덩샤오핑을 재촉했다. 그날 밤 쉬자툰의 전화통은 사방에서 걸려온 전화로 불이 날 정도였다. 노인과 2시간 넘게 무슨 얘기 나눴는지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홍콩과 마카오 업무를 총괄했던 랴오청즈(오른쪽). 국가 부주석으로 내정됐지만 쉬자툰의 홍콩 부임 20일 전 사망했다. [사진 김명호]

홍콩과 마카오 업무를 총괄했던 랴오청즈(오른쪽). 국가 부주석으로 내정됐지만 쉬자툰의 홍콩 부임 20일 전 사망했다. [사진 김명호]

1개월 후, 당 중앙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이 쉬자툰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덩샤오핑 동지가 중앙상무위원회에서 네 얘기 많이 했다. 장쑤성의 발전이 괄목할 만하다며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은퇴를 유보하자는 의견에 상무위원 전원이 동의했다.” 장쑤성에는 쉬자툰의 유임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찍 입당했지만 직급은 아래였던 사람들이 백방으로 쉬자툰을 걸고 넘어졌다. 베이징까지 달려가 원로들에게 쉬자툰의 은퇴를 요구했다. 이유도 다양했다.

후야오방의 제의로 중앙 상무위원들이 쉬자툰의 거취를 토론했다. 총리 자오쯔양(趙紫陽·조자양)이 경제협작구(經濟協作區) 주임을 맡기자고 주장했다. 장쑤, 저장, 안후이 3개 성과 상하이의 경제를 전담하는 국무원 직속 신설기구였다. 후야오방이 이의를 제기했다. “쉬자툰은 박력 하나로 30년 가까이 장쑤성을 이끌다 보니 적이 많다. 장쑤성에서 들고 일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홍콩을 거론했다.

“비당원을 우리 편 만드는 능력 남다르다”

1947년 봄, 신화통신사 홍콩분사 기자 초대회. 오른쪽 넷째가 신중국 초대 외교부 정보국장을 지낸 궁펑. [사진 김명호]

1947년 봄, 신화통신사 홍콩분사 기자 초대회. 오른쪽 넷째가 신중국 초대 외교부 정보국장을 지낸 궁펑. [사진 김명호]

“아직도 홍콩에는 국민당 지지자가 많다. 백만 명을 웃돈다. 영국이 홍콩을 떠날 날도 14년밖에 남지 않았다. 홍콩의 주권은 중국에 귀속시키고 관리는 계속하겠다는 영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홍콩인들이 많다. 쉬자툰은 당성(黨性)이 강하고, 사상이 개방적인 공산주의자다. 당원이 아닌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통전(統一戰線) 능력이 남다르다. 지금 홍콩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현재 신화통신사 홍콩분사 사장이 공석이다.”

홍콩과 마카오 업무를 총괄하는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도 쉬자툰이라면 환영한다며 좋아했다. 덩샤오핑에게는 서면으로 보고했다. 당일로 찬동(贊同) 두 글자를 보내왔다. 후야오방이 쉬자툰에게 통보했다. “장쑤성에는 더는 있지 마라. 신화통신사 홍콩분사(分社) 사장으로 나가라.” 평소 쉬자툰은 홍콩에 관심이 없었다. 가본 적도 없고, 광둥어도 할 줄 몰랐다. 하면서 배우겠다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947년 3월 홍콩에 간판을 내건 신화통신사 홍콩분사는 베이징의 신화사와는 상관이 없는 별개기구였다. 분사 사장의 국내 직함도 중국 공산당 홍콩 마카오 서기였다. 역대 사장들도 한국전쟁 휴전담판 중국 측 고문과 외교부장을 역임한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 1967년 홍콩 좌파폭동을 기획한 양웨이린(梁威林·양위림) 등 전설적인 인물이 많았다. 부사장과 부장들 거의가 항일전쟁 시절, 홍콩 외곽의 빨치산 지휘관이 대부분이었다.

1983년 5월 19일, 신화통신사가 쉬자툰의 홍콩분사 사장 임명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6월 30일, 특수한 지역에 특수 임무를 띈, 특수 인물이 홍콩에 첫발을 디뎠다. 보안요원들에게 둘러싸인 쉬자툰에게 여기자 한 명이 마이크를 들이댔다. 홍콩에 온 목적과 홍콩 총독을 언제 만날 건지 물었다. 쉬자툰의 대답은 명쾌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왔다. 총독은 중국인 거주지부터 둘러본 후에 만나겠다.” 홍콩이 발칵 뒤집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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