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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역사적 오점으로 남을 20대 국회의 공수처 입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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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각계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과 친여 군소정당들이 결국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무기명 투표를 하자는 야당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4+1’ 정당 소속 의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찬성표를 던졌다. 헌법 위반 소지가 다분하고 민주국가의 틀을 허물 가능성이 큰 법이 정상적 국회 논의 과정도 없이 만들어졌다. 20대 국회와 이 법안을 주문한 문재인 정부는 무소불위의 ‘괴물’ 수사기관을 만든 역사적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기명 투표로 ‘4+1’이 일사분란하게 찬성표 #‘괴물’ 수사기관의 전횡을 국민이 감시해야

이날 가결된 공수처 법안은 현 정권 핵심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부랴부랴 성안됐다. 그래서 정권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는다. 여권 내부에서도 검찰과 경찰이 고위 공직자에 대한 수사에 착수할 때 공수처에 알리게 돼 있는 조항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야당의 비판처럼 ‘문재인 정권의 범죄 은폐처이고 친문 범죄 보호처’가 아니라고 정부와 여당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검찰 일각에선 공수처 설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수뇌부 집단 사표 제출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한다. 정권과 검찰의 정면충돌에 따른 검란(檢亂)이 발생할 경우 국가의 사정 중추 기관이 무너지는 비극이 발생한다. 공수처는 내년 7월에 출범할 것으로 예상한다. 현재 검찰이 진행하는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과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 감찰 무마 사건 등을 수사할 시간은 충분히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정식으로 임명된 뒤 수사팀에 대한 보복성 인사를 할 가능성이 있지만, 윤석열 검찰총장은 흔들림 없이 수사 지휘에 임하기 바란다.

향후 국회는 공수처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조처를 강구해야 한다. 우선 공수처가 검찰이나 경찰에서 수사 중 알게 된 공직자 비리 정보를 받는 과정과 수사 진행 경과에 대해 국민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공수처장과 수사 검사들이 권력 실세들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무혐의 결정을 내리면 처벌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정부 지지 세력들의 대거 입성이 예상되는 검사와 수사관들에 대한 채용 기준도 엄격히 해야 한다.

법조계와 학계에서는 사법부나 검찰과 달리 공수처는 헌법적 근거가 없는 조직이기 때문에 위헌 소지가 크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 정부 출범 이후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 상당수가 친여 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돼 헌법소원 결정에서 공정한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다.

공수처는 정권의 의중에 따라 검찰과 공직 사회에 수사의 칼날을 휘둘러대는 초법적 사정 기관이 될 가능성이 크다. 현 정부 비리 은폐에 악용될 소지도 충분하다. 이제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불행한 사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