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느닷없는 알바니아 붐···그곳 연동형 비례제의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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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민주당 의원님들이 대한민국의 수준을 알바니아 수준으로 전락시킨 거예요.”

지난 24일 선거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filibusterㆍ무제한 토론)에 나섰던 권성동 자유한국당 의원이 한 말이다. 알바니아는 우리나라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지만 권 의원은 이런 표현도 썼다. “알바니아 사람들이 농사철에는 크로아티아ㆍ마케도니아ㆍ그리스로 넘어와서 날품팔이ㆍ일용직으로 일하다가 돌아가요. 이렇게 못사는 국가입니다. 독재국가라니까요.”

권 의원 외에도 지난 24~25일 필리버스터에 나선 정유섭ㆍ유민봉 등 한국당 의원들은 일제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알바니아도 폐기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레소토ㆍ베네수엘라도 언급됐지만 알바니아 이야기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알바니아에선 무슨 일이 있었기에 2019년 말 대한민국 국회에서 알바니아 붐이 불었을까.

무슬림이 과반…1991년 공산 독재 끝내고 다당제

21세기 동유럽 발칸반도 [중앙SUNDAY]

21세기 동유럽 발칸반도 [중앙SUNDAY]

발칸반도의 그리스 북쪽에 접한 알바니아는 15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슬람 영향권에 들어 지금도 유럽에서 유일하게 인구(약 288만 명) 과반이 무슬림인 나라다. 1912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1939년~1944년 전체주의 이탈리아ㆍ독일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중 ‘알바니아 민족해방전선’을 이끌던 공산주의자 엔베르 호자(Enver Hoxha)가 종전 후 집권해 40년 간 ‘알바니아 노동당’의 총서기로 1인 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노동당 독재는 1985년 호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6년 간 계속되다 구소련 붕괴 이후인 1991년 알바니아에선 다당제 첫 총선이 치러졌다. 대통령제를 가미한 내각제를 도입한 것이다. 우리나라와 알바니아가 수교한 것도 그 해 8월이었다.

1991년 총선은 140석 전부를 지역구에서 단순다수제로 선출하는 방식이었지만 1년 만에 치러진 1992년 총선에는 ‘지역구 100석-비례대표 40석’으로 개편된 선거제가 적용됐다. 이후 한동안 알바니아의 선거제도는 총선이 치러질 때마다 지역구 의석수 또는 총 의석수가 큰 폭으로 바뀌는 등 불안정했다. 선거제의 기초를 담은 성문 헌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연동형 대란

선거제도의 골자가 담긴 성문헌법이 도입된 것은 사회당(Socialist Party) 정부 시절인 1998년이었다. 새 알바니아 헌법은 선거제도를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혼합제로 정하고 지역구 의석수를 100석, 비례대표 의석수를 40석으로 못박았다. 이 헌법을 따른 선거법 개정으로 도입된 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였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두지 않고 40석을 모두 전국 단위 정당득표율에 따라 배분한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법 개정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된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지역구에서 정당 득표율 이상의 의석수를 채운 정당에게는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지 않도록 해 군소정당 진입을 쉽게 만든 대신 득표율 2.5%를 달성하지 못한 정당과 4%를 못 채운 선거연합체는 의석을 받지 못하게 하는 봉쇄조항을 뒀다.

‘비례한국당’과 ‘비례민주당’ 등 아이디어의 기원이 된 위성정당 난립 현상이 두드러졌던 선거는 2005년 총선이었다. 민주당 계열에서는 공화당 등 4개 위성 정당이, 사회당 계열에서는 사회민주당ㆍ환경농민당 등 6개 위성 정당이 출현했고 공화당ㆍ사회민주당ㆍ환경농민당 등은 지역구에서는 한 석도 얻지 못했지만 비례대표로만 각각 11석ㆍ7석ㆍ4석 등을 획득했다. 반면 민주당과 사회당은 지역구로만 각각 56석과 42석을 차지했고 전체적으로는 민주당 중심의 야당 연합세력이 과반을 차지했다.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이 정리한 2005년 알바니아 총선 결과. [유민봉 의원실]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이 정리한 2005년 알바니아 총선 결과. [유민봉 의원실]

결론은 ‘비례성 강화’

한국당 의원들의 주장대로 부작용을 경험한 알바니아는 이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포기했다. 그러나 2008년 개헌과 선거제 개편을 통한 알바니아의 선택은 지역구 중심의 단순다수제로의 회귀가 아닌 서유럽식 ‘권역별 비례대표제’로의 전환이었다. 140개 모든 의석을 광역 단위별 비례대표로 채우는 방식이다. 유민봉 한국당 의원은 지난 25일 무제한 토론 과정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해 “장점이 많은 제도”라며 “성공을 위해선 충분한 비례대표 의석수 확보, 중복입후보제 허용, 의원내각제 권력구조 등 패키지 부품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비례성을 강화해 의회 중심주의가 자리잡기 위해선 개헌과 대선거구제 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로의 대전환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6월 지방선거 유세에 나선 에디 라마 알바니아 총리 [연합뉴스]

지난 6월 지방선거 유세에 나선 에디 라마 알바니아 총리 [연합뉴스]

임장혁 기자ㆍ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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