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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담보대출의 유혹…저축은행이 ‘유령회사’ 돈줄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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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특수잉크 제조업체 녹원씨엔아이(전 큐브스) 주식은 7월 29일 거래 정지됐다. 전직 임원의 횡령과 허위 공시 등으로 상장폐지 심사 대상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지난 6월말까지도 이 회사의 전환사채(CB)를 담보로 한 대출 거래가 이뤄졌다. 상상인저축은행은 최근 2년간 녹원씨엔아이의 CB를 담보로 180억원(11건)가량의 대출을 해줬다. 녹원씨엔아이는 경영진이 클럽 ‘버닝썬’ 사건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사모펀드 의혹’과의 관련 의혹이 불거지며 주목 받았던 회사다.

2년간 CB 발행한 38곳 거래정지 #CB담보 돈 빌려준 저축은행 타격 #“작전세력에 개인투자자들 피해”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유니온저축은행은 3월15일 디스플레이 부품업체인 유테크 CB를 담보로 경영컨설팅업체에 50억원을 빌려줬다. 3월4일 ‘관리종목 사유가 발생했다’는 공시로 유테크 주가가 반토막난 뒤 대출이 이뤄졌다.

저축은행의 CB·BW 담보 대출 취급액.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저축은행의 CB·BW 담보 대출 취급액.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19일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실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이처럼 CB를 담보로 한 무분별한 저축은행 대출이 늘고 있다. 지난해 자료를 분석한 결과 상상인·상상인플러스·유니온저축은행 3곳은 CB담보 대출(신주인수권부사채(BW) 포함)이 전체 여신의 30%가량(잔액 기준)을 차지했다. 같은 기간 상상인저축은행이 취급한 신규 CB담보 대출액은 5229억원(179건)에 이른다. 자산 기준 업계 1위인 SBI저축은행이 같은 기간 20억원 미만의 CB담보대출 단 한 건을 실행한 것과 비교된다.

CB 발행은 재무구조상 문제로 유상증자나 회사채 발행조차 어려울 때 기업이 택하는 ‘최후의 자금조달’ 수단이다. 담보물도 취약할 수 있다. 때문에 CB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위험성이 큰 투자라는 게 은행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대형 저축은행 관계자는 “CB담보 대출은 높은 이자를 챙길 수 있지만 워낙 위험성이 높고 전문 분야이기 때문에 담보물을 평가하는 게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2017년부터 CB담보로 대출 영역을 넓혔던 유진저축은행은 지난해말 관련 영업을 중단했다. 유진저축은행 관계자는 “CB는 주식시장과 연결돼 발행사가 부실해지면 상장폐지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자료에 따르면 상상인·상상인플러스·유니온·유진저축은행이 최근 2년간(2018년 1월~2019년 9월 말) 대출 담보로 잡은 CB의 발행사 중 38곳은 주식시장에서 관리종목으로 지정됐다. 이 중 저축은행 3곳 이상이 공통으로 CB담보 대출을 해 준 곳도 녹원씨엔아이, 디지탈옵틱 등 6곳이나 된다. 개인회생과 자본잠식, 감사의견 부적정 등의 이유로 상장폐지 위기에 놓인 코스닥 업체다.

더 큰 문제는 주가 시세조종을 일삼는 작전 세력이 CB담보 대출을 악용하는 데 있다. CB 발행 소식은 주가에 호재다. 발행사의 신용도를 인정받고 신규 사업 투자 자금이 유입된 것으로 여겨져서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작전 세력이 규모 작은 코스닥 기업과 짜고 유령회사를 세운 뒤 CB를 발행해 주가를 띄우는 데, 대부분 개인 소액투자자(개미)가 투자했다가 피해를 본다”고 말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재무건전성이 취약한 일부 코스닥 업체가 CB 발행에 성공하는 것을 보면 주가를 띄우려는 작전세력에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금융당국은 투자자의 피해를 막기 위해 관련 규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서민과 영세자영업자를 위한 자금을 지원한다는 저축은행의 본연의 역할에 비춰볼 때도 CB와 BW 담보대출로의 과도한 쏠림현상은 올바르지 않다”며 “CB 담보 대출 제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염지현·강광우·정용환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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