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출마…‘선거운동 공개 마라’ 정부가 권고하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첫 여성 시장이 탄생했다. 클라우디아 로페스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도 주목받고 있다. 그가 지지자들을 향해 화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첫 여성 시장이 탄생했다. 클라우디아 로페스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도 주목받고 있다. 그가 지지자들을 향해 화답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27일(현지시간) 남미 국가 콜롬비아에서 치러진 지방선거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선거운동 기간에 살해된 후보자가 7명에 달할 정도로 정치 테러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 지방선거 피살 후보자만 7명 #"선거운동 장소 알리지 말라" 정부 지침 #총격 피살 후 모친과 함께 불탄 채 발견도

이번 선거를 통해 수도 보고타에서 처음으로 여성 시장이 등장했고, 당사자인 클라우디아 로페스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라는 점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출마하는 이 나라의 선거가 다시 한 번 국제사회에서 이슈가 됐다.

정치 테러 빈번, 출마 자체가 목숨 건 일  

총알 박힌 장미가 든 택배, 도로 점거와 총격, 방탄조끼 입고 방탄차를 탄 채 선거운동에 나서는 후보들….

드라마나 영화 얘기가 아니다. 콜롬비아에서 이번 선거운동 기간 일어난 일이다. 총격 등으로 피살당한 후보자만 7명. 후보자에 대한 크고 작은 폭력 사건은 108건에 이른다. 타깃이 된 정치인의 가족과 측근들도 함께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피해자는 더욱 늘어난다.

지난 9월 콜롬비아 수아레즈 시장 후보로 나선 카리나 가르시아가 불탄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AP=연합뉴스]

지난 9월 콜롬비아 수아레즈 시장 후보로 나선 카리나 가르시아가 불탄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AP=연합뉴스]

대표적인 게 지난 9월 수아레스 시장 후보 카리나 가르시아 살해 사건이다.
그는 어머니, 수행원 등과 함께 불타버린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누군가 총으로 이들을 살해한 후 차에 불을 질렀다. 톨레도의 시장 후보로 출마한 오를리 가르시아는 13발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출마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인 셈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콜롬비아에서 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며 “2016년 정부와 반군(콜롬비아무장혁명군ㆍFARC)의 평화협정 이후 반군이 해체 수순을 밟았음에도 정치 테러는 줄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때문에 후보자들의 선거 운동은 전쟁과도 같았다.

정부가 후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쓴 돈만 하루 77만 달러(약 9억원). 방탄차 수요도 폭증했다. 방탄조끼를 지급하고 경호인력을 확충했음에도 폭력 행위는 계속됐다. 내무부에서 “비상사태에 가깝다”고 밝혔을 정도다.

WP는 “정부는 ‘선거 운동 개최 장소를 알리지 마라’ ‘군중이 있는 곳에 가지 마라’는 등의 지침을 내렸지만 출마한 후보들에겐 비현실적인 얘기였다"며 실상 제대로 된 대처 방법이 없었을 정도로 폭력 사태가 만연해 있었다고 보도했다. 선거는 자신을 드러내 대중을 상대하는 정치 행위인데 콜롬비아에선 선거운동 장소를 공개하지 않는 게 권고 사항이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콜롬비아 전역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7일(현지시간) 콜롬비아 전역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콜롬비아 정부는 후보자에 대한 테러가 반군 잔당과 마약 카르텔의 소행이라고 보고 있다. 이반 두케 대통령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불법 무장 단체와 마약 카르텔을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게 전문가들과 주요 외신의 진단이다. 불법 무장 단체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도 정치 테러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WP는 “마약 카르텔 등이 주도한 테러는 전체 사건의 20%에 불과했으며, 정확한 배후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한 지역을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지역 유지와 정치ㆍ경제적 이해관계로 대립한 이들이 당한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정치 테러, 콜롬비아의 오래된 잔혹사

콜롬비아에서 정치인을 표적으로 한 테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48년 4월 대선후보 호르헤 엘리에셀 가이탄이 총격을 당해 살해당한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그를 따르던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수천 명이 사망했다. 재난에 가까운 일이었다. 1989년에는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하던 루이스 카를로스 갈란 상원의원이 피살되기도 했다. 정치인을 향한 테러가 “오래되고 잔혹한 역사"(WP)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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