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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통제력, 그리고 자기 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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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서점의 신간 서적을 다 펼쳐보는 것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지만, 목록은 유심히 살펴본다. 사람들의 집단적 욕망이 거기에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시대정신이다. 그걸 얼기설기 엮으면 정교한 사회비평은 아니더라도 ‘트렌드 서사’라 할 만한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만들어진다.

‘자존감’ 책 쏟아져 나오는 배경 #‘괜찮다’는 말은 한 잔 술과 같아 #이야기의 힘으로 무력감 맞서기

자기계발서 열기가 가라앉은 뒤 ‘힐링’과 ‘독설’ 서적이 인기를 끌다가 웰빙(well-being,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 휘게(Hygge, 안락함을 뜻하는 노르웨이어),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약자)를 말하는 책들이 나왔다. ‘사회는 모르겠고 나 하나만이라도 성공해 보자’ 하고 결심했다가, 악을 써보다 상처받고 다독이고, ‘이젠 그냥 편히 살고 싶어’ 하고 꺾이는 마음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하다.

한두 해 전부터는 자존감을 말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편히 살고 싶은데, 가만히 혼자 있어도 그런 나를 남도 아닌 나 자신이 우습고 한심하게 여기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 하는 하소연에 부응하는 기획인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당장 듣고 싶어하는 답은 ‘괜찮아’라는 말인 모양이다. 검색해서 세어 보니 올해 1~8월에 나온 국내 단행본 중 제목에 ‘괜찮아’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44권이다. 만화책은 제외했다.

물론 1등이 아니어도 괜찮고 돌아가도 괜찮고 쉬어가도 괜찮다. 오늘도 괜찮고 내일도 괜찮다. 귀여운 동물 캐릭터가 그런 말을 해주면 더 뭉클할 테다. 이제 내 머릿속에는 힘들고 지칠 때 맥주 몇 캔을 마시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자신이 하찮고 형편없이 느껴질 때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 건 필요하다. 그 말을 해주는 주변 사람이 없다면 찾아서 들을 일이다. 그러나 맥주처럼 그 말도 너무 많이 마시면, 그 말만 마시면, 취해서 망가진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동시에 자존감 하락으로 고민하게 된 걸까. 앞서 얘기한 트렌드 서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성공은 자기계발 따위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먼 목표로 느껴지고, 독하게 해도 안 되고, 성공은 됐으니 조용히 웰빙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사회. 그런 곳에서 집단적 무력감이 퍼지는 것이 이상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그러므로 나는 괜찮은 인간이 아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한국 특유의 ‘모멸 문화’도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너의 자존감이 낮아져야 나의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믿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터럭 한 올만큼이라도 내 지위가 높은 것 같다면 그걸 꼭 확인해야 한다. 모멸감을 주는 언어도 아주 잘 발달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혁신과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다. 된장녀, 맘충, 한남, 지잡대, 틀딱, 기레기, 검새, 견찰……. 그러고 보니 ‘예의’와 ‘무례함’도 요즘 신간 에세이의 주요 키워드다.

자존감 회복의 첫 단추가 ‘괜찮아’라는 위로라면, 마지막 단추는 사회 변화에 있다고 믿는다. 기회가 있고, 서로 존중하는 세상. 중요한 것은 그사이 단추들이다. ‘괜찮아’라는 말을 충분히 듣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마도 두 번째 단추는 개인 차원에서 조금씩 통제력을 확인하고 키우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스스로에게 ‘무언가는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심어주면서 무력감을 조금이라도 몰아내자는 것이다.

특별한 자원이 없어도 혼자 할 수 있고, 성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구체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하다. 방 청소 같은 것이 적당한 사례가 되겠다. 아버지가 부자든 가난하든 제 몸이 건강하다면 자기 방은 스스로 정리할 수 있다 하고 나면 기분이 좋다. 맨몸운동도 함께 권한다.

세 번째 단추 후보로는 자기 서사를 쌓는 일이 떠오른다. 인간은 자기 삶을 이야기로 파악하는 존재다. 무력감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내가 여태까지 한 것이 없고,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고,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는. 자존감 역시 이야기인 것은 마찬가지다.

사실 무력감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면 고전적인 영웅 서사다. 가진 게 없었고, 시련을 겪었으나, 결말은 창대한. 미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소재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므로 희망이, 목표가 필요하다.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과거가 보잘것없고 현재가 힘들수록 더 대단해진다. 그는 실패하더라도 비극적 영웅이 되지, 무력한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