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과 9번 통화했다는데···정작 '지소미아'서 사라진 정의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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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급에서 9번 통화를 했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의 소통 부재 논란이 확대되자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여기서 실장급은 한국에선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미국에선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일컫는다. 이들은 양국 외교안보 라인의 지휘자격으로, 정 실장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주관하기도 한다. 이례적으로 전화통화 횟수까지 밝히며 “최고위급에서 정보를 주고받았으니 불통은 아니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정 실장이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다. “몇 차례 중요 국면이 있지만, 정 실장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식의 얘기가 나온다. 최근 ‘구한말을 연상케 한다’는 지적이 쏟아질 정도로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에 격랑이 일고 있는데, 핵심 당국자의 존재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22일 오전 이낙연 국무총리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22일 오전 이낙연 국무총리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로 한·미 동맹의 균열을 야기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는 지소미아 종료 국면에서 정 실장의 발언이나 입장은 거의 소개된 게 없다. 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했던 22일 NSC 상임위가 열리기 전에 이낙연 국무총리를 만나기 위해 광화문 정부 청사를 찾았다가 눈에 띄었고, 지소미아 종료 후엔 미국 측 파트너인 존 볼턴 보좌관과 전화통화를 하고 한·미·일 3국 공조를 유지하는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고 청와대가 알린 정도다.

지소미아 국면을 주도하다시피 하는 인물은 직제상 정 실장의 지휘를 받는 김현종 안보실 2차장이다.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한 22일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면담을 하며 우리 측 입장을 전달한 인물도 김 차장이다. 앞서 그는 한·일 갈등이 치솟던 지난달 말 비밀리에 미국 워싱턴을 찾아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직무대행,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찰스 쿠퍼먼 국가안보부보좌관 등을 두루 만나 한국 정부의 뜻(intention)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내·외신 언론과 만나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설명한 사람도 김 차장이다.

이에 대해 여권과 가까운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김 차장은 위태하다 싶을 정도로 저돌적인 측면이 있다. 정 실장이 그런 김 차장의 기세에 눌린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업무 스타일은 꽤 다르다고 한다. 외교관이라기보다 통상 전문가인 김 차장은 승부사적 기질이 있고, 이 과정에서 때로 상대방을 거칠게 몰아붙이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일 기자들과 만나서도 “안보와 통상이 다르다는 점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 요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했다.

반면, 정 실장은 정제된 발언 등 직업 외교관으로서의 기질이 체화돼있다고 한다. 한 전직 외교관은 “정 실장은 외교관 중에서도 특히 적을 잘 안 만드는 스타일이다”고 전했다. 정 실장은 고(故) 김동조 전 외교부 장관의 비서로 외교관의 주요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이 점 또한 그의 업무 스타일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한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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