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거리곳곳 억울한 사정 하소연 행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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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모스크바의 주요 관공서주변, 버스터미널과 길거리에는 언뜻 보기에 거지차림의 나이든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된다. 소련길이 초행인 외국인들은 그들이 측은하게 보여 조그만 자선이라도 베풀려 들지만 이 「걸인들」의 속사정은 그게 아니다.
이들 거리의 부랑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동전 몇닢이나 지폐 따위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리 지어 죽치고 있다가 낯선 외국인들이 지나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곤 한다.
『잃어버린 직장과 빼앗긴 집을 되찾아달라』는 것이 이들의 하소연이다. 이들은 한 보따리씩의 서류뭉치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으며, 그 서류들은 하나같이 하도 오래돼 귀가 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막힐 내용들이다. 개중에는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것도 있다.
바람난 남편이 관련공무원과 짜고 아내를 딸로 입적시키고 내좇은 뒤 정부와 결혼한 경우가 그 대표적 사례다.
그런가하면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는 동안 공무원이 나서 자신의 집을 남에게 넘겨버려 졸지에 집을 잃은 경우도 있다.
술취한 경찰이 모는 차에 아들을 잃고도 뺑소니여서 잡을 길이 없다는 핑계를 경찰이 대고 있다는 하소연도 있다.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강력한 추진으로 서방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소련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관리들의 부패로 사정이 말이 아닌 셈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관공서에 탄원을 내고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해놓고 있지만 결과통보는 감감무소식이라고 호소한다.
이들이 외국인들을 붙잡고 애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공서에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것이다.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들인 이들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하는 일은 많은 공무원들이 이들의 하소연을 경청하기는커녕 비웃는다는데 있다.
발렌토라는 아가씨는 아무리 관계기관에 탄원을 내도 해결이 안되자 국제사법재판소에 「집을 찾아달라」는 탄원을 냈는데 당국에서 찾아와 『당신의 아파트가 파나마운하만큼이나 중요하냐』는 조롱을 받았다.
딸로 호적에 올려져 남편과 가정을 한꺼번에 잃은 바실리예바여인의 사연은 더욱 기구하다. 새로 짝을 이룬 두사람이 관리들을 매수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르바초프 집권이후에는 전보다 사정이 많이 호전돼 체포·구금이 적어지긴 했다.
그럼에도 웃지 못할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주변의 환경오염문제에 분노를 느낀 한 사나이는 『관리들은 엿이나 먹어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크렘린궁 밖에 서 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유럽의 군축·인권문제등을 총괄하는 헬싱키선언 감시기구의 요원인 피츠파트릭씨는 『우리는 더 많은 사례를 갖고 있다』며 『그들은 결코 미치지 않았는데 공권력의 거대한 힘에 눌려 미쳐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개방과 개혁의 물결을 타고 경제폭에서의 서구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소련이지만 내부적으로 해결해야할 난제들은 산적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춘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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