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에 일침 '우군' 싱가포르, 韓의 화이트국 명단에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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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태국 방콕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 관련 외교장관회의(7월31일~8월3일)에서 일본의 경제 보복을 둘러싼 한ㆍ일 간 국제 여론전은 한국의 판정승이었다. 복수의 회의 결과물인 의장 성명에 보호무역주의와 반세계화 및 한ㆍ일 간 무역 갈등에 대한 우려가 담겼는데, 양시ㆍ양비론적 입장에 익숙한 아세안으로선 이례적 언급이었다.

싱가포르 "상호 의존도 높이자" 일본 역공

특히 아세안+3(한ㆍ중ㆍ일) 외교장관회의에서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한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부 장관이 한국에는 ‘귀인’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고노 외상이 화이트 국가(안보우호국)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은 한국에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아세안처럼 애초에 화이트 국가 혜택을 받지 못했던 다른 국가들과 동등한 대우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자, 발라크리슈난 장관은 “지역 공동 번영을 위해 상호 의존도를 높여야 한다. 한국을 뺄 게 아니라, 아세안도 화이트 국가에 넣는 게 맞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그 전까지는 아세안 10개국 중 어느 나라도 화이트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취지로 말하면서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 여섯번째)이 2일(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아세안+3 외교장관회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은 왼쪽에서 네번째. [뉴스1]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 여섯번째)이 2일(현지시간) 태국 방콕 센타라 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아세안+3 외교장관회의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은 왼쪽에서 네번째. [뉴스1]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일본을 한국의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기 위해 13일 행정예고한 ‘전략물자 수출입 고시일부 개정안’을 확인해보니, 한국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싱가포르를 비롯한 아세안 어느 국가도 화이트 국가로 우대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이 먼저 부당한 수출 규제 조치를 취한 데 대한 불가피한 대응이지만, 이를 국제사회에서 설득하기 위한 여론전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

4대 수출통제체제 가입해야 화이트 국가  

그 간 전략물자 수출입 고시는 수출지역을 ‘가’와 ‘나’로 구분해왔다. ‘가’ 지역은 4대 국제수출통제체제(바세나르 체제, 핵공급그룹, 호주 그룹,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모두 가입한 29개국, ‘나’ 지역은 ‘가’에 해당하지 않는 국가들로 구분됐다. 미국, 일본, 영국, 호주 등 ‘가’에 속하는 29개국이 화이트 국가였다.
산자부는 이번에 고시를 개정해 ‘가’를 ‘가-1’과 ‘가-2’로 나눴다. 화이트 국가 중 일본만 ‘가-2’국으로 분류해 ‘나’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의 까다로운 수출 통제를 적용하기로 했다.
아세안 국가들은 고시 개정 전에도, 이후에도 ‘나’ 지역에 속한다. 아세안 외교전에서는 우군들을 확보했지만, 수출 통제 적용은 별개의 문제인 셈이다. 훨씬 더 정교한 국제여론전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이유다.

"정교한 국제여론전 전략 필요"

외교 소식통은 “애초에 일본이 화이트 국가를 건드릴 때 우대 조치인 ‘+’를 ‘0’으로 되돌리는 것이지 불이익은 아니라는 식의 교묘한 논리를 세워 보복을 위장했다. 우리도 일단 맞불 조치를 취한 만큼 이런 일본 논리에 휘말리지 않도록 국제여론전 대비를 탄탄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일본을 한국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전략물자 수출입고시 변경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일본을 한국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전략물자 수출입고시 변경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을 화이트 국가에서 제외하기 위해 시행령을 개정하며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해’라고 주장하면서도 구체적 근거를 대지 못했다. 반면 산업부는 고시를 개정하는 이유로 “국제수출통제체제의 기본원칙에 어긋나게 제도를 운영하거나 부적절한 운영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등 국제공조가 어려운 국가에 대해 수출관리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일본의 부당한 조치가 이유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정부의 조치는 실제 일본 기업에 타격을 유발하기보다는 상징적 측면이 크다는 점도 다르다. 이를 통해 오히려 협상에 응하라는 대일 메시지도 보냈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12일 “의견 수렴 기간(9월3일까지)에 일본 정부가 협의를 요청하면 한국 정부는 언제, 어디서건 이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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