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지난 3~4일 발생한 연쇄 총기 테러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책임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5일 백악관에서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번 총기 테러 사건이 대통령 선거 쟁점으로 부상하자 진화에 나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총이 아니라 (가해자의) 정신 질환과 증오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라며 “잔인한 비디오게임도 폭력을 미화(glorification)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총기 허가 제도에 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개인적인 정신 질환이 사고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다. 야당인 민주당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총기 소지 규제 강화 목소리에 반대의 뜻을 간접 표명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총기 소지를 규제하겠다는 방안 대신 대량 살상 가해자들이 신속히 처형될 수 있도록 새로운 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총기협회(NRA)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공화당의 주요 지지세력으로 활동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테러의 원인을 정신 질환으로 규정한 것은 이번 사건이 자신의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비판도 피해가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이번 연쇄 총기 테러 중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역인 엘패소에서 발생한 사건은 중남미 이민자들을 표적으로 삼은 인종차별적 증오범죄일 가능성이 대두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민주당의 이민자 출신 여성 의원들을 향해 지난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트윗을 올린 데 이어 볼티모어의 민주당 중진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일라이자 커밍스를 무능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적 언행으로 자극받은 이들이 참사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 지역인 엘패소가 고향인 민주당 대선주자 베토 오로크 전 하원의원은 총격 현장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은 백인 우월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입장문 후반부에서 이런 비난에 대한 대응 문구도 넣었다. “(우리) 나라는 인종차별주의와 편견(bigotry), 백인 우월주의를 비난해야만 한다”며 “증오는 미국에 설 자리가 없다”고 하면서다. 그러나 입장문은 이번 사건의 원인을 정신 질환이라고 규정하면서 인터넷의 자극적 콘텐트에 주로 화살을 돌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을 만나기 약 3시간 전 트위터에 이번 사건을 언급하며 “공화당과 민주당이 함께 강력한 신원조회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그 법안은 아마도 이민 제도 개혁과 연동(marrying)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 트윗은 그러나 이번 테러 참사를 그의 이민 제도 개혁에 이용하려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불렀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생방송 카메라 앞에 서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함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목이 살짝 메인 듯한 목소리로 이번 범죄 가해자들에 대해 “사악하다(wicked)” “괴물(monster)”이라고 표현했다. 기자들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등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매체는 물론 대부분의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총기 규제법 도입의 필요성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데 더 주안점을 두고 보도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입장문까지 발표한 것은 그만큼 이번 이슈가 미국 전역을 강타하고 있다는 의미다. 4일 엘패소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고로는 멕시코 국적 7명을 비롯해 5일 현재 20명이 사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입장문에서 멕시코 희생자들에게도 애도의 뜻을 전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