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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창제 주역이 승려?… '나랏말싸미' 6대 의문 따져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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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가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여 휘청하고 있다. 130억원을 들인 이 작품은 지난달 24일 개봉해 8월 1일까지 누적 관객이 91만여 명에 그쳤다. 특히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선 네티즌의 1점짜리 ‘평점 테러’에 시달리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지난달 29일 '나랏말싸미 상영 및 해외보급 금지 가처분 신청'이라는 글까지 올라왔다.

신미 대사, 산스크리트어 영향 등 논란 #"일부 과장에도, 불교 기여한 건 사실" #전문가들 "영화적 상상력 그대로 봐야"

관객들은 무엇보다 영화가 세종대왕이 아닌 승려 신미의 역할을 강조한 데 불만을 토로한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단독 창제한 건 역사적 사실인데, 세종을 폄훼하고 잘못된 사실을 전파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조철현 감독은 한글 창제의 여러 가설 중 하나를 다뤘을 뿐이라며 오히려 “세종대왕과 한글의 위대함을 그리고자 했다”고 항변한다. 과연 ‘나랏말싸미’에서 무엇이 사서(史書)에 기록된 ‘진실’이고 무엇이 ‘역사적 상상력’에 힘입은 것일까. 실록과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팩트체크’를 해보았다.

⓵ 신미는 허구 인물? X 실록에도 나오는 실존 승려

“중(僧) 신미(信眉)를 우국이세(祐國利世) 혜각존자(慧覺尊者)로 삼고…”(문종실록 2권)

문종이 즉위한 1450년 7월 6일의 기록이다. ‘우국이세 혜각존자’란 나라를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한, 지혜를 깨우쳐 반열에 오른 분‘이란 의미다. 영화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신미대사는 이처럼 실록에도 버젓이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승려 신미(1403~1480?)는 충북 영동에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수성(守省).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은 세종 시대 문장가이자 집현전 학사이기도 했다. 영화에선 신미가 역적의 아들로 나오지만, 이는 그의 반골 기질을 강조하기 위한 극적 설정일 뿐이다. 오히려 사대부 명문가 출신으로 유학과 불교에 모두 능했다고 전해진다. 영화에서처럼 군왕의 면전에서 절을 하지 않고 “주상”이라고 호칭하는 것 역시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종과 신미의 첫 만남이 언제였는지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소헌왕후가 승하한 뒤 세종은 그의 명복을 비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 행사를 신미가 주도했고 이 때 모인 승려가 2000명이 넘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5월 27일).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박해일이 연기하는 신미 스님은 훈민정음 창제에서 비밀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박해일이 연기하는 신미 스님은 훈민정음 창제에서 비밀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⓶ 신미가 한글 창제 주도? X 세종이 “친히” 창제

문제는 신미대사가 과연 영화에서처럼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주도적으로 관여했는가다. 이에 대해 다수 전문가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실록엔 아예 세종이 ‘친히’ 한글 창제를 했다고 나온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중략)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다만 승려 신미로 대변되는 산스크리트어 영향설은 일부 학자들도 제기해 왔다. 『한글의 발명』(김영사, 2015)을 쓴 국문학자 정광(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이 대표적이다. 정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글 첫 자음이 기역(ㄱ)인데, 티베트 문자와 파스파 문자 모두 케이(k) 발음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인도 범자(산스크리트어 표기)에서도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한글의 독창성은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것이 탄생하기까지 '문자의 실크로드'를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정 교수는 “세종이 신미를 만난 걸로 추정되는 1445년(세종 27년)은 그가 훈민정음으로 고민하던 때라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던 신미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근거가 되는 게 신미의 동생 김수온이 쓴 시문집 『식우집』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최근 펴낸 『동아시아 여러 문자와 한글』(지식산업사, 2019)에선 신미의 제안으로 모음 11자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신미 대사를 제외하더라도 세종이 글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녀인 정의공주, 수양대군, 안평대군, 동궁(훗날의 문종) 등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숱하게 전해진다. 실록에 나온 “친히 창제했다”는 표현은 왕조 사회에서 모든 업적을 군왕 중심으로 기술하는 사관(史觀)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다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나홀로’ 창제한 건 아니라도 그 과정을 주도한 것은 ‘역사적 팩트’란 게 사학‧국문학계 정설이다.

⓷ 한글 보급에 불교가 기여? ○ 언해본 불경 다수 간행  

영화에선 신미뿐 아니라 여타 승려들의 역할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된다. 이를 두고도 “과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실제로 언문 보급엔 불교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훈민정음(한글)의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슬옹 세종 국어문화원 원장(문학‧국어교육학 박사)은 “소헌왕후 사후에 해례본이 완성되자 세종은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옮겨 명복도 빌고 새 문자도 보급하는 전략을 썼다”고 설명했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을, 세종 자신도 직접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언문으로 펴낸 게 대표적이다.

김 원장은 “훈민정음을 반대한 사대부를 막아내는 게 첫째 과제였는데, 세종은 ‘내 사랑하는 왕비가 죽지 않았느냐. 내가 이런 식으로 명복을 빌겠다는데 막을 테냐’라는 논리로 불경 언해본을 널리 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조선이 공식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만큼 불교의 기여나 협조를 대놓고 기록하긴 어려웠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⓸ 집현전 학사도 한글 반대? ○ 최만리 ‘갑자상소’ 대표적

영화에선 집현전 대제학에 올랐던 정인지마저 세종의 문자 창제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절반쯤 진실이다. 당시 집현전은 당대 최고 유학자들의 집합체였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그들 세계관의 전부였다. 당연히 한자 기득권을 뿌리째 흔드는 새 문자 창제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집약해서 보여준 게 소위 ‘갑자상소’로 일컬어지는 최만리의 상소문(1444년)이다.

다만 집현전 학자 전체가 세종의 뜻을 거역하진 않았다. 세종은 정인지를 시켜 젊은 학자들을 선별한 뒤 훈민정음 해설 작업을 시키기도 했다. 최항(집현전 교리)‧박팽년‧신숙주(이상 부교리)‧성삼문(수찬)‧이선로‧이개(이상 부수찬)‧강희안(돈녕부 주부) 등이다. 40대 중반 정인지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이들이 훈민정음을 2년 6개월간 해설하는 작업을 거쳐 펴낸 게 해례본이다. 특히 정인지는 최만리의 상소문이 제기한 문제 지적에 답하는 형태로 서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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⓹ 소헌왕후 집안이 몰살돼? ○ 태종의 ‘외척 경계’ 일환

영화에서 신미는 세종의 문자 창제 의도를 의심하면서 ‘왕비의 집안을 몰살시킨’ 비정함을 따져 묻는다. 실제로 소헌왕후의 부친인 청천부원군 심온은 1418년 세종 즉위와 동시에 옥사에 휘말려 사약을 받고 처형됐다. 이는 개국공신 가문이자 정통 무신 출신 심온의 세력이 커질 경우 왕권이 위협받을 것이란 우려 하에 상왕 태종이 주도한 ‘숙청’이란 게 일반적 해석이다. 이 일로 소헌왕후의 모친 안씨도 관노비에 처해졌다.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소헌왕후 역할을 맡은.고 전미선 배우.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소헌왕후 역할을 맡은.고 전미선 배우.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그럼에도 소헌왕후는 무사했다. 워낙 덕스러운데다 8남 2녀를 두는 등 왕실의 후사를 든든히 한 덕분이었다. 세종은 즉위 8년째인 1426년 “국후(國后)의 어머니로 천인이 된 것은, 그것이 은혜에 있어서나 의리에 있어서나 모두 옳지 못하다”(세종실록 32권)며 안씨를 면천시켰다. 훗날 심온 역시 무고로 밝혀져 세종의 아들인 문종 1년에 복관됐다. 소헌왕후는 영화에서처럼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5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⓺ 언해본과 해례본 헷갈려? △ 세종이 읊은 서문이 108자였을지도…

시민단체인 한글문화연대(대표 이건범)는 지난달 31일 비판 성명을 통해 영화 막판의 해례본 묘사도 문제 삼았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되는 서문이 원래 109자였는데 세종이 여기서 1자 줄여 108자로 만들었다는 대목과 관련해서다. 한글문화연대는 "이 서문은 세종이 아니라 세조 때 나온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문이다. 영화에서는 당초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이 그랬다는 착각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이들 지적대로 한글 서문이 세조 5년(1459)에 간행된 『훈민정음 언해본』에 처음 실린 건 맞다. 다만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는 내용의 서문이 처음 선보인 곳은 1446년 음력 9월에 나온 『해례본』이다. 해례본엔 한자(총 54자)로 쓰였는데, 갓 만들어진 한글을 당시 보편 문자인 한자로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연합뉴스]

훈민정음 해례본[연합뉴스]

김슬옹 원장은 “애초에 세종은 우리말로 서문을 읊었을 것이고, 해례본은 부득이하게 이를 한자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세종이 말로 전한 108자의 서문이 구전돼 내려오다 해례본의 한자 서문을 언해본에서 한글로 바꿔쓰는 과정에서 뒤늦게 기록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가 108자인 것이 영화에서처럼 불교와 관련됐을 가능성도 있다. 김 원장은 “『월인석보』 1권 쪽수가 108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면서 “108자 서문은 훈민정음 창제‧보급에 기여한 불심(佛心)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며 "이번 기회에 한글 창제가 있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과학·언어학적 배경이 논의·탐구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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