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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 이끈 ‘삼총사’… 진실과 팩션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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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세번째 사극 주연에 나선 배우 송강호.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세번째 사극 주연에 나선 배우 송강호.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공기의 탄생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스크린으로 옮긴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 24일 개봉)의 도전과제는 이것이다. 지금 이 자판을 두드리는 데도 쓰이는(그래서 당신이 읽고 있는) 스물여덟 자모음이 실은 생명체처럼 어느 순간 ‘탄생’했다는 사실. 게다가 그 중심에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송강호)이 있다면 도전 장벽이 험준하지 않을 수 없다.

송강호·박해일 주연 '나랏말싸미' 24일 개봉 #'지식 기득권'에 맞선 세종의 한글 창제 조명

‘나랏말싸미’의 큰 틀은 드라마‧영화 등으로 숱하게 변주돼 온 세종의 애민정신과 한글 창제 이야기다. 다른 점은 문자 창제의 과학 원리와 이를 가능케 한 ‘이질적인 것의 접합’에 집중했단 사실이다. 수천년 한자 문화권에 갇혀 있던 나라말 체계를 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파스파 문자 등과 접목을 통해 소리문자로 탄생시켜가는 산고와 희열이 생생하다. “먹고 살기도 벅찬 백성이 배워서 쓰려면 무조건 쉽고 간단해야 한다”는 세종의 신념에 따라 처음엔 자음, 다음엔 모음, 마침내 형태음운론적 완성체로서의 신생 문자가 모습을 드러낼 때, 공기 같은 한글이 새삼 떨리듯 다가온다.

‘소리문자’ 탄생의 산고와 희열

특히 창제 주역을 놓고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라는 주류 학설 대신 신미 스님(박해일)이라는 제3의 인물을 끄집어냈다. 세종이 유언으로 신미 스님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는 한줄 기록에서 착안해 상상력으로 재창조한 인물이다. 그 매개가 되는 게 팔만대장경이다. 일본국 사신에게 “밥은 빌어먹어도 진리는 빌어먹을 수 없다”고 신미가 호령할 때, 영화는 팔만대장경뿐 아니라 훈민정음도 이를 만든 역사와 떼놓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고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16년간 법문을 새겼던 승려들처럼, 신미를 필두로 한 학조(탕준상)‧학열(임성재) 등이 널브러진 한지에 자모음 획을 더하고 빼면서 ‘집단창작’에 헌신하는 과정은 그래서 울림을 준다.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실존인물 신미 스님을 연기한 배우 박해일.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실존인물 신미 스님을 연기한 배우 박해일.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대립의 돌파구 뚫는 '여장부' 소헌왕후

또 하나 팩션으로 재가공된 인물은 소헌왕후(전미선)다. 숭유억불 조선 왕조에서 내밀히 불교를 숭상하는 소헌은 대립의 고비 때마다 돌파구를 마련해주는 ‘숨은 여장부’로 제시된다. 그가 궁녀들을 통해 ‘언문’을 전파하면서 “언제까지 우리가 까막눈으로 살아야 하느냐”고 기품 있게 토로할 때, 오랫동안 공기처럼 스크린을 지켜온 중견 배우를 잃은 게 새삼 안타깝게 다가온다. 전미선으로선 송강호‧박해일과 ‘살인의 추억’ 이후 16년 만에 삼자 호흡을 맞춘 게 유작이 돼 버렸다. 15일 메가박스 코엑스몰에서 열린 언론 시사 및 간담회에서 조철현 감독은 “백성들은 더는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라는 극 중 대사를 전미선이 만들어냈다며 상실감을 감추지 않았다.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소헌왕후를 연기한 고 전미선 배우.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세종대왕과 주변 인물들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극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에서 소헌왕후를 연기한 고 전미선 배우. [사진 메가박스중앙 플러스엠]

세종의 이미지를 “새롭고 창의적으로 파괴”하려 했다는 송강호는 전작 ‘기생충’의 소시민을 남김없이 지웠다. 자주 “도와다오”를 말하는 세종은 “얼마 남지 않은 내 목숨”에 시름겨워 하는 인간이자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프로메테우스이며 “중국을 능가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돈키호테적 군주. 다만 제왕의 권위에 연연하지 않는 세종의 모습은 2011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학습돼 유달리 신선하진 않다. 송강호로선 913만명을 동원한 ‘관상’(2013)과 624만명을 모은 ‘사도’(2015) 이후 세 번째 사극 주연이다.

역사가 스포일러…관념적 갈등 아쉬워

1443년 세종의 창제 작업은 유자(유교 사상을 따르는 사대부)들의 ‘지식 기득권 사수’에 맞서 은밀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조철현 감독이 택한 ‘제3의 이야기’는 역사를 뒤트는 팩션이지만 진중한 접근법 때문에 마치 정사(正史)처럼 느껴진다. 조 감독은 “가장 긴밀한 파트너였던 사람들이 경쟁자이기도 한 점 등 내부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아쉽게도 이 같은 갈등은 대체로 행동이 아니라 대사를 통해 웅변 되는 데 그친다. 세종과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스포일러인 상황에서 기발한 창작 대신 상대적 정공법을 택한 결과다.

등장인물들 너나없이 ‘백성’을 얘기하지만 정작 이들의 생생한 삶은 화면 밖에 관념적으로 존재한다. 상당수 장면이 궁궐 혹은 사찰 내 갇힌 점도 액션 블록버스터에 익숙한 관객에게 자칫 지루할 수 있다. 이를 보완할 볼거리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등이 두루 등판해 ‘문화재 자부심’을 북돋운다. 첫 장면의 기우제를 비롯해 종반부의 월인천강지곡이 흐르는 천도재까지 소위 ‘고유의 전통 문화’가 기시감으로 느껴질지, 21세기의 이색 체험으로 느껴질지는 관객의 몫이다. ‘사도’ 각본을 포함해 ‘평양성’(2011)‧‘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등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사극에서 제작‧기획‧각본으로 잔뼈가 굵은 30년 영화인의 입봉작이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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