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국에 WTO 개도국 혜택 안 된다”는 트럼프의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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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제 “발전한 나라들이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무역 특혜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했다. 개도국은 일부 품목에 대해 관세 장벽을 쳐도 세계무역기구(WTO)가 허용하는 등의 특혜를 겨냥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자신의 트위터에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들(the world’s richest countries)이 WTO 규칙을 피하는 특혜를 받기 위해 개도국임을 주장하면서 WTO는 붕괴(broken)된다. 더는 안 된다”고 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이어 미국까지 압박 가세 #쌀 시장 열어야 할 수도 … 가벼이 듣지 말아야

로이터통신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중국을 타깃으로 삼았다”고 분석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USTR에 보낸 지침서(memorandum)는 상당 부분을 중국에 할애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트럼프의 화살은 중국만 조준하지 않았다. 한국·멕시코·터키 등도 ‘개도국 지정이 부적절한 나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경제협력기구(OECD)와 주요 20개국(G20)에 동시에 포함된 나라”라고 이유까지 밝혔다.

국내에서는 당장 “농산물 빗장을 열어젖히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이 혜택을 받는 유일한 분야가 농업이어서다. 한국이 WTO 개도국 지위를 잃으면 지금처럼 수입 쌀에 513% 관세를 붙일 수도 없고, 농업에 보조금을 잔뜩 줄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쌀 관세가 뚝 떨어져 캘리포니아산 쌀이 대거 풀리고, 종내에는 국내 쌀 농업이 기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식량 안보 위기론까지 불거지는 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무사태평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은 그간 개도국 지위 관련, WTO 회원국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특혜를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밝혀 왔다”며 “현재 농산물 관세나 보조금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문제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USTR에 보낸 지침서를 자세히 검토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90일 후까지 WTO 논의에 진전이 없으면 USTR이 자체적으로 부적절한 국가를 골라 개도국 처우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독자적으로라도 압력을 가하겠다는 선언이다. 과연 미국의 압력을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 농식품부는 “빗장을 계속 걸어놓을 수 있다”고 한다. 일본에 경제 보복을 당하고도 “설마…” 하며 무대책으로 일관하는 안이함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일본은 경제 보복의 강도를 높이려 하고 있다. 한국을 ‘안보우호국 명단(화이트 리스트)’에서 빼는 법령 개정안을 다음 달 2일 각료회의에서 처리할 것이라고 일본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통과되면 1000개 넘는 품목이 규제 대상이 된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출할 때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2차전지용 소재, 수소경제에 꼭 필요한 탄소섬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이어 한국 산업을 뒤흔들 2차 쓰나미다.

정부는 이달 말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 외상 간의 회담을 추진 중이다. 여기서 일본이 경제 보복을 철회할 실마리를 잡고, 두 나라 간의 갈등을 외교적으로 논의해 해결할 물꼬를 트는 게 급선무다. 또한 정부 안에 퍼진, 근거 없는 낙관론은 자제해야 한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이어 미국의 WTO 특혜 시비까지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자세와 대응이 너무 안이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