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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읽는 책 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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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잊기 좋은 이름

잊기 좋은 이름

평소 문서에 줄을 많이 긋는다. 전에는 색연필이나 형광펜을 이용했는데 지금은 거의 연필만 쓴다. 어떤 문장 아래 선을 그으면 그 문장과 스킨십하는 기분이 든다. 종이 질과 연필 종류에 따라 몸에 전해지는 촉감은 다 다르고 소리 또한 그렇다. 두껍고 반질거리는 책보다 가볍고 거친 종이에 그은 선이 더 부드럽게 잘 나가는 식이랄까. 어디에 줄 칠 것인가 하는 판단은 순전히 주관적인 독서 경험과 호흡에 따라 이뤄진다. 그리고 그렇게 줄 긋는 행위 자체가 때론 카누의 노처럼 독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과 리듬을 만든다.

-김애란 산문 『잊기 좋은 이름』중에서

개인적인 얘기지만, 책을 빌리지 않고 사서 봐야 하는 게 줄 치며 읽는 습관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 줄은 왜 볼펜이 아니라 연필로 쳐야 하는가를 놓고 친구와 입씨름하다가 감정이 상했던, 약간은 민망한 기억도 있다. 작가나 소문난 독서가 중에 종이 덕후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 디지털 시대 종이책의 존재 이유기도 하다. 이 문장도 ‘연필로’ 줄 치며 읽었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