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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상대의 말문을 트는 방법, 덕담보다 이 것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35)

전직 회사에서 영업부장을 할 때다. 하루는 어느 기관의 요직에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를 만나 우리 회사와의 거래를 트기 위해서다. 사무실에는 이미 그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며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생각했다.

비서에게 그가 무슨 취미를 가졌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비서가 하는 말이 그는 취미가 전혀 없다고 한다. 술도 안 하고 골프도 치지 않으며 퇴근 시간만 되면 일찍 집에 간다고 했다. 휴일에도 집에 있으면서 난만 키운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난을 키운다고?

대화 트게 한 난 이야기

전직 회사에서 영업부장을 할때 거래를 트기 위해 어느 기관의 요직에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비서에게 그의 관심사를 물었더니 오로지 난만 키운다는 얘길 들었다. 사진은 어느 화훼단지의 난 화분. [중앙포토]

전직 회사에서 영업부장을 할때 거래를 트기 위해 어느 기관의 요직에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비서에게 그의 관심사를 물었더니 오로지 난만 키운다는 얘길 들었다. 사진은 어느 화훼단지의 난 화분. [중앙포토]

오랜 시간을 기다린 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예의상 나와 수인사를 나누었지만 솔직히 빨리 가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먼저 차를 한잔하며 덕담을 건넸다. 그리고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사무실에 있는 난을 둘러보며 “난이 꽤 많네요. 집에 동양란 몇 수를 키우고 있는데 관리를 잘못해선지 시들시들하고 일부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을 꺼냈다.

그건 사실이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난을 재배하려면 어떻게 키워야 좋은지 거의 반 시간 가까이 설명을 해주었다. 덕분에 나는 난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얻었다. 그도 만족해하는 듯했다. 난에 관해 이야기를 마칠 땐 마치 오래 사귄 지기 같았다. 회사와의 거래를 부탁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뜻밖에 그는 나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렇게 이야기를 잘하느냐며 내게 공치사를 했다. 사실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가 다 했다. 난 그저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을 뿐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의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회사와 거래를 시작하겠다는 메시지였다. 우리 부서에선 환호성을 올렸다. 그때 나는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더구나 상대방의 관심사를 같이 나눌 수 있으면 그건 성공한 것이다.

직장에서 퇴직 후 지역사회에 기여할 바를 찾다가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진행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나는 서식을 갖춰 지원했다. 면접하는 날이다. 방송국 대표가 이전에 방송 일을 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경험은 없지만 대학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음악다방에서 DJ로 일했다고 답했다. 그는 당시 음악다방 DJ가 꽤 인기가 있었다며 빙긋이 웃었다. 그 경력이 인정돼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다. 한동안 교육을 받고 방송에 투입되었다.

직장에서 퇴직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진행자에 지원했다. 한동안 교육을 받고 방송에 투입되었는데 준비를 오래 했음에도 실수가 계속 되었다. [사진 pxhere]

직장에서 퇴직 후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진행자에 지원했다. 한동안 교육을 받고 방송에 투입되었는데 준비를 오래 했음에도 실수가 계속 되었다. [사진 pxhere]

오래 준비를 했음에도 첫 방송에서 실수를 연발했다. 두 번째도 그랬다. 이러다가 방송국에 누를 끼칠 것 같아 사의를 표명했더니 조금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며 오히려 격려를 해주었다. 내가 진행했던 방송은 지역인사나 시민을 초청해 그들과 현안을 나누는 프로였다.

초기에는 내가 묻고 싶은 말을 꺼냈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방송 전에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알아보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 얘기를 물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렸던 게스트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관해 물어보자 자연스럽게 얘기를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며 나도 방송에 익숙해졌다.

나는 직장생활과 방송국 경험을 통해 남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이런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훨씬 사회생활을 잘했을 것이다. 뒤늦게 생각하니 가족에게도 그러하지 못했다. 가정에서의 대화는 늘 훈시 위주의 일방적인 나의 얘기로 끝났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나와 얘기하기를 꺼렸다. 한동안 고심을 하다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지난 일을 사과했다.

모든 종교의 공통 황금률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자란 기성세대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와 흡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꼰대라는 비속어로 지탄을 받고 급기야 황혼이혼을 당하기도 한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지녀야겠다. 세상 모든 종교에서 공통으로 말하는 황금률이 있다.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거든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 말은 지금도 유용하다.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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