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현금박치기, 눈도장 찍기…우리 경조사 문화 어찌할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32)

요즘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한창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 경제의 초석을 다진 세대다.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아프리카의 밀림을 헤치고 다니며 시장을 개척했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고국으로 송금했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이들 덕에 가족들은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들이 퇴직할 나이가 됐다. 베이비부머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어려웠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자녀의 혼사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치르고 싶은 것이다.

아마 자신의 성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급적 많은 사람을 불러 결혼식을 거행한다. 혼례업체는 이런 심리를 이용해 이들을 더욱 부추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든 상관없지만, 문제는 여유가 없는 사람의 경우다. 이들도 남의 눈을 의식해 결혼식만큼은 무리하려고 한다. 결국 빚을 지는 등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행사가 된다.

허례허식 가득 찬 한국의 경조사 문화

결혼식은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허례허식 가득한 행사가 되고, 방문객들에게는 경조사비로 부담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중앙포토]

결혼식은 남의 눈을 의식하느라 허례허식 가득한 행사가 되고, 방문객들에게는 경조사비로 부담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중앙포토]

은퇴자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도 바로 이 경조사비다. 다른 비용은 줄일 수 있지만, 경조사비는 체면 때문에 줄일 수가 없다. 과거 혼례식은 어려운 이웃을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으나 요즘에 와서는 자신의 부와 성공을 과시하는 행사로 변모했다. 자신도 출가시켜야 할 자식이 있으므로 뒷날을 생각해 마지못해 경조사에 참석한다.

혼주에게 눈도장만 찍고 얼른 밥만 먹고 식장을 빠져나온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조사 풍경이다. 그렇다고 경조사비가 혼주나 상주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거의 큰 비용이 허례허식이나 밥값으로 지출된다.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사회에서는 경조사 때 주고받는 것이 돈이 아니라 편지나 카드, 조그만 선물이다. 특히 영국 사람은 지인의 혼례를 축하할 때 무엇보다 손으로 쓴 카드나 편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장례식 때도 돈을 주고받는 일은 없다. 장례식에 필요한 꽃을 사 가는 정도다.

프랑스인은 장례식에서 추도하는 것 외에 무엇인가 줘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경조사에서 돈을 주고받는 일은 드물다. 기본적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친인척이나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초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결혼식에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동안 여러 경조사에 참석하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났다. 우선 나부터 실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딸아이의 결혼식 때다. 아이가 내게 청첩장이 몇장이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한장도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가까운 지인 몇몇에는 전화로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스스로 정한 알림의 대상은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전부터 보아왔으며 아이 또한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내는 나의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기꺼이 따라주었다. 오히려 결혼식이 끝나자 홀가분하다고 한다.

경조사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도층부터 힘써야 한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조용하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다. 고인의 유지와 유족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가족장을 치렀다. [연합뉴스]

경조사 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도층부터 힘써야 한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조용하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기를 원했다. 고인의 유지와 유족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가족장을 치렀다. [연합뉴스]

어머니의 상사 때도 그랬다. 이때도 내가 정한 부고의 대상은 내 어머니를 어렸을 적부터 따랐고 어머니 또한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문상객이 많지 않아 나는 그들과 어머니와의 추억을 조용히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경조사 알림의 기준은 혼주나 상주와 유대가 있는 사람이기보다 혼례 및 상례 당사자와 가까운 사람이다. 흔히 우리는 상주와 아는 사이라고 해서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장례에 참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죽음 알리지 말라는 어느 동창

어느 날 동창회에 갔다가 얼마 전 동창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왜 우리가 그의 부음을 모르고 있었지 하고 반문하니 그가 자기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죽으면서도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몇 년 전 자기 아들 결혼식에서도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

오래전 대안학교 간디학교를 설립한 양영모 이사장도 죽을 때 “육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고 싶다. 화환이나 부조도 일절 받지 말라. 지금까지 주위 분들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더는 받을 수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최근에는 LG그룹의 구본무 회장이 장례식에 사람 부르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 조화도 받지 않았다. 지도층에서 이렇게 솔선수범할 때 우리나라의 경조사 문화도 달라질 수 있다. 앞으로 국회의원을 뽑을 때 그런 사람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백만기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