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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추면 바람난다" 30~40년 전엔 일반적인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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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더,오래] 강신영의 쉘 위 댄스(1)

 댄스스포츠 세계는 문화, 건강, 사교,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자리를 잡고 있고 알수록 흥미롭다. 댄스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 즐거움을 외면하고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댄스 동호인으로 시작해  30년 댄스계에 몸 담았던 필자가 그곳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독자와 함께 공유한다.<편집자>

정비석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39;자유부인&#39; 포스터(좌)와 70여 처녀와 부인을 간통한 혐의로 체포된 댄스교사 박인수(우). [중앙포토]

정비석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39;자유부인&#39; 포스터(좌)와 70여 처녀와 부인을 간통한 혐의로 체포된 댄스교사 박인수(우). [중앙포토]

‘댄스’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걸어 온 댄스의 불행한 역사 때문이다. 그 역사에서 한국 전쟁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인 1953년 정비석의 ‘자유 부인’ 연재와 1955년 ‘박인수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소설 ‘자유 부인’은 대학교수의 부인이자 선량한 주부인 오선영이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고, 유부남과 깊은 관계에 빠져 가정 파탄의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서울신문에 연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그 후 영화로도 몇 차례 제작되었다.

자유부인의 연재가 끝나자 이 신문의 구독률이 엄청나게 줄었다. 당시 서울 법대 황산덕 교수는 이 소설의 해악을 중공군 50만 명에 필적할 만큼 사회적으로 위험한 요소로 비유하여 화제를 낳았다. 실제로 정비석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사회를 음란 퇴폐로 물들여 적화 통일을 기도하지 않았느냐는 혐의로 경찰 특무대의 심문을 받기도 했다. 이 책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하여 4·19 혁명 전까지 금서로 지정되었다. 일종의 컬쳐 쇼크였다.

박인수 사건은 자유 부인이 불을 질러 당시 한창 유행이던 댄스를 미끼로 약 1년 동안 무려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했다가 구속된 사건이다. 자유부인이 상상의 소설이었으나 박인수 사건은 상상의 소설이 현실로 나타난 사건이었다. 그래서 파문이 컸다.

이 재판의 방청을 위하여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두 사건 등장인물이 대학교수 부인, 고등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라 관심이 더 했다. 여성을 가정 파탄에 처하게 하고 신여성들을 농락한 수단이 댄스였다는 것 때문에 댄스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게 각인되었다. 유교적 사상이 강하던 시절, 남녀가 유별한 시대에 남녀가 서로 만나서 손을 잡고 추는 춤의 세계는 별세계이자 충격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남녀가 불륜을 저지르는 수단으로 춤이 화제가 되었다. 춤이 과연 무엇인데 선망의 대상인 대학교수나 신여성들이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고 쉽게 허물어지는가도 궁금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국 전쟁 당시 피난 차 부산에 내려간 김두한 일당은 카바레를 급습하여 춤추던 남녀를 망신 주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 드라마 &#39;야인시대&#39; 영상 캡쳐]

한국 전쟁 당시 피난 차 부산에 내려간 김두한 일당은 카바레를 급습하여 춤추던 남녀를 망신 주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 드라마 &#39;야인시대&#39; 영상 캡쳐]

종로를 주름잡던 김두한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 춤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 전쟁 당시 피난 차 부산에 내려간 김두한 일당은 카바레를 급습하여 춤추던 남녀를 망신 주는 장면이 나온다. 전방에서는 국군이 적군과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어두운 조명 아래 남녀가 부둥켜안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은 퇴폐적이라며 응징한 것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권은 정치 혁명 외에도 사회적 혁명, 도덕 혁명까지도 손을 댔다.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폭력배 소탕, 불법 댄스 단속 등이 명분이 좋았다. 그 당시 신문 사회면에 장바구니 여인네들이 단속에 걸려 얼굴을 가리며 줄줄이 경찰서로 향하는 사진이 종종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댄스는 퇴폐적인 것이며 기피해야 할 문화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부부볼룸댄스로 새로 등장한 댄스스포츠 열풍은 거셌다. 각 유명 백화점 문화센터에 부부볼룸댄스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생기고 대학교, 평생 교육원에도 댄스스포츠 과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시안 게임 같은 국제 스포츠 대회에도 채택되었다. 사람들의 댄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퇴폐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나 정작 해보니 건전한 스포츠이자 취미로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댄스는 그동안 어두운 시절을 겪었던 사교댄스와 새로 주목받는 댄스스포츠로 양분되어 발전했다. 사교댄스는 지르박(Jitterbug)을 중심으로 한 춤으로 미군에 의해 이 땅에 들어왔으나 불법이라는 이유로 단속을 당하다 보니 숨어서 나름대로 유지되면서 한국식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댄스스포츠는 초기에 스포츠댄스로 소개되면서 스포츠라는 명분을 지니게 되었다.

1995년에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고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추진하면서 댄스스포츠로 개칭되었다. 댄스스포츠는 밝은 조명 아래 넓은 플로어에서 춤을 추다 보니 퇴폐라는 오명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당시는 부부댄스가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부부가 아닌 직장인 중심의 취미교실 내지는 생활체육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막상 댄스스포츠가 새로운 모습으로 붐을 이루다 보니 사교댄스도 덩달아 나쁠 것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문화센터, 구민회관 등에도 사교댄스가 채택되어 댄스스포츠와 병존하기 시작했다.

댄스스포츠는 스포츠 종목이라서 어느 정도 체력이 필요하다 보니 중장년까지는 무난하지만, 노년이 즐기기에는 다소 힘겨운 편이다. 그래서 노년층은 사교댄스가 오히려 적당하다는 추세로 가고 있다. 체력을 많이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춤을 춰서 즐겁고 리듬 감각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신영 댄스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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