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희철의 졸음쉼터

내비게이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희철 산업1팀 기자

문희철 산업1팀 기자

세상에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여성이 있다. 내비게이션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내가 수십 번 엉뚱한 길에 접어들어도 바가지를 긁기는커녕 매번 우회로를 일러주곤 한다.

살다 보면 이정표도 정답도 없는 막막한 사거리에 서는 경우가 있다. 이때마다 ‘1·2차로를 이용하십시오’라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매일 똑같은 하루가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막연해질 때쯤 그녀는 이곳이 바로 ‘목적지 주변입니다’라고 깨우쳐준다.

새삼 신기한 건 그녀는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항상 정확히 알려준다는 것이다. 인생은 도대체 가늠하기가 힘들어서 아무리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도 길 끝에 무엇이 있고 어디로 귀결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녀는 정확히 몇 ㎞/h의 속도로 어디를 지나치고 있는지 안다. 심지어 이 길의 종착지가 어딘지도 명확히 지정한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이유다.

때론 내가 가는 길이 확실하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지나치다 한두 번 훑어봤을 뿐인데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착각한다. 그때마다 성격 좋은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흔히 남자는 ‘세 명의 여성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라’는 조언을 듣는다.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내비게이션. 개똥철학으로 치부하기에는 나름의 통찰이 담겨있다. ‘너 같은 자식 낳아봐야 안다’는 어머니 심정을 이해했더라면. 무리해서 집 사자는 아내 논리에 수긍했더라면. 혹은 ‘속도를 줄이십시오’라는 말을 한낱 잔소리로 치부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인생의 항로가 살짝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삶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거대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이 길이라고!’라고 참견하는 사람이 동행한다는 건 아무튼 괜찮은 일이다. 비록 위성항법시스템(GPS) 수준의 정밀한 조언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천천히 좀 달리라고 투덜대는 그녀가 보조석에 앉은 덕분에, 울퉁불퉁한 인생의 과속방지턱을 무사히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희철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