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혜순 “자기 영토 없는 새, 이 땅의 여성을 보는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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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등단 40주년을 맞은 김혜순 시인. 그는 꾸준히 여성의 소리를 시에 담는다. [사진 김혜순]

등단 40주년을 맞은 김혜순 시인. 그는 꾸준히 여성의 소리를 시에 담는다. [사진 김혜순]

“시와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는 내 삶의 조건이자 존재의 전부다. 이는 내가 살아가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다.”

등단 40년 새 시집 『날개 환상통』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후보도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한 김혜순 시인(64)이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그는 40년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 언어로 ‘여성’과 관련된 시들을 쏟아냈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시인에게 40여 년이란 시간은 시적인 것이 아니라 광폭한 것이었다. 그는 제도화된 역사와 가장 먼저 작별하는 시적 신체의 최전선에 있었다”고 평했다.

‘날개 환상통’

‘날개 환상통’

최근 나온 열세 번째 시집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작은 사진)에서도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는 계속된다. 특히 4부 ‘여자들은 왜 짐승이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에는 폭력과 억압에 고통받는 여성의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시인은 “내가 쓰는 시의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낙태와 같은 문제, 주변 시선에 의해 여성이 규정되는 문제 등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유가 자연스럽게 시가 된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새’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해 등장한다. 그는 “새의 움직임이 여성의 움직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갯짓을 하는 행위가 주는 이미지가 여성의 동작을 닮은 것은 물론, 새는 이 땅에 자신의 영토가 없다는 점도 여성을 닮았다. 우리나라 여성들 역시 이 땅에 자신의 그라운드가 없지 않나”고 되물었다.

최근 ‘미투’ 등으로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과거 내가 이런 시를 쓰면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요즘 들어 여성주의적인 관점이 폭발하면서 곪았던 문제들이 터지고 있는데 보기 좋은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억지로 시를 쓰지 않는다. 내면에 무언가가 차오를 때까지 고요히 기다렸다가 어느 순간 한 번에 뱉어낸다. 6개월 동안 한 편도 쓰지 않을 때도 있고, 앉은 자리에서 여러 편을 쏟아낼 때도 있다. 그는 “살다 보면 스쳐 지나가는 삶의 순간들이 갑자기 크게 벌어지면서 나에게 각인될 때가 있다. 그럴 때 시를 쓰게 되는 것 같다”며 “어떤 리듬의 어머니가 나에게 어느 순간 시를 쓰는 리듬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시는 여성을 닮은 장르다. “사회는 주로 부정적인 자리에 주로 여자를 위치시킨다. 약하고 예민하고 불안정하며 불필요한 곳.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시가 나오는 자리”라는 설명이다. 시인에게 시를 쓰는 원동력을 묻자 “알 수 없다. 계속 살아가니까 시를 쓰는 것 같다”고 답했다.

김 시인은 지난 10일 캐나다에서 주는 ‘그리핀 시문학상(The Griffin Poetry Prize)’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그리핀 시문학상은 시집에 주는 상으로, 김 시인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은 인터내셔널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최종 수상자는 6월 6일 발표된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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