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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노딜의 죄인은 아니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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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효식 기자 중앙일보 사회부장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

지난달 28일 오후 4시쯤 베트남 하노이 JW메리어트 호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였다. 한국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급히 호텔을 빠져 나가려는 모습이 기자들의 눈에 띄었다. 10여명의 기자가 여러 대의 카메라와 함께 100여m 긴 복도에서 추격전이 벌어졌고 그는 결국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머리부터 양복이 땀에 흠뻑 젖은 그에겐 “비건 대표에게 어떤 설명을 들었느냐”“왜 회담이 무산됐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는 기자들과 10여분 실랑이 끝에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한 뒤 호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번 하노이 회담 성공을 위해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조율을 해온 이도훈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이었다.

비슷한 듯 다른 장면은 또 있었다. 가나스기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도 이날 호텔 로비에서 서너 시간 대기한 끝에 미 국무부 관계자들로부터 브리핑을 듣고 5시쯤 호텔을 떠났다. 그를 쫓던 일본 기자는 한 명이었다. 가나스기는 “비건 대표를 만났느냐”는 등 비슷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 말만 하곤 호텔 정문 로비로 빠져나갔다.

‘노딜’의 당사자인 미 국무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다음날 1일 오후 메트로폴 호텔. 트럼프-김정은이 마주 앉았던 회담장에서  국무부와 현지 하노이 미국대사관 직원 200여명이 모여 쫑파티(랩파티)를 열었다. 이들은 “공식 합의문이 없다는 점 하나만 빼고는 성공적인 회담이었다”며 순조로운 회담 진행을 자축했다.

한·미·일 3국의 현장 뒷모습처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제외한다면 하노이 회담 결렬의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한국이었다. 영변과 종전선언·연락사무소, 금강산 등 일부 남북 경협에 대한 제재 완화가 교환될 것이라고 믿었다. 지난해 4·27 판문점 선언의 판박이였던 6·12 싱가포르 공동 성명처럼 9·19 평양선언이 하노이에서 재연될 것이라는 기대에 빠졌었다. 북·미 관계의 추동자 역할을 자임한 한국 외교가 여기에 올인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결과는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영변 폐기’카드로 북한이 주도했던 실무협상 분위기와 회담은 정반대로 흘렀다. 트럼프 대통령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준비한 탄도미사일·생화학무기 폐기까지 요구하는 빅딜 문서를 김 위원장에 내밀어 판을 바꿨다. 디테일이 아니라 비핵화 의지를 시험했다. 거기서 북한의 살라미 전술은 무너졌다. 물론 우리가 하노이 회담 무산의 모든 책임을 떠안을 이유는 없고, 그럴 위상도 안 된다. 북·미간 어떤 합의든 좋다는 맹목이 깨진 상황에서 남북관계는 물론 비핵화 전략을 복기하고 , 성찰해 볼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