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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병원·체육회가 ‘채용 비리’ 온상…재조사해 끝장 보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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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고용 부패 근절’ 외치는 박은정 권익위원장을 만나다

공공기관 채용 비리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있는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 [김경록 기자]

공공기관 채용 비리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있는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 [김경록 기자]

지난 20일 정부가 공공기관 채용 비리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205개 기관을 상대로 벌인 조사에서 182건(수사 의뢰 36건, 징계 요구 146건)이 적발됐다. 면접 점수 조작, 무자격자 고용, 임직원 자녀 무단 채용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리가 총망라됐다. 2017년 가을의 ‘특별 점검’에서 무더기로 채용 비리가 드러났고, 이후 정부가 근절을 약속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국민은 더 충격을 받았다. 이번 조사에서 평소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돼 온 의료계, 체육계, 문화·예술계에서 특히 부정이 많이 드러났다. 수사 의뢰 건 36건 중 17건이 이 세 분야에서 나왔다. 정부 조사를 주관한 국민권익위원회의 박은정(67) 위원장을 22일에 만나 채용 비리 근절 대책 등을 물었다.

수사 의뢰한 36건 가운데 17건 #의료·체육·문화예술계에 속해 #경찰관 80명 현장에 투입해 조사 #자료 압수할 수 있도록 법 고쳐야 #‘김태우 전 수사관 비보호’는 오해 #‘비밀누설’이 문제되면 보호 가능

조사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2017년에 정부가 전수 조사를 하고 대책을 내놓았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와 충격을 받았다. 젊은이들이 사회 문턱에서 이런 일을 겪는다. 공정 사회가 구현되고 있다고 누가 믿겠는가. 의료, 체육, 문화·예술 관련 직역에서 수사 의뢰와 징계 요구 건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비리가 나왔다. 이 부분에 대한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
공무원 시험 학원 강의실의 앞자리에 앉으려고 새벽부터 서울 노량진 학원가에서 줄맞춰 서 있는 젊은이들. [최승식 기자]

공무원 시험 학원 강의실의 앞자리에 앉으려고 새벽부터 서울 노량진 학원가에서 줄맞춰 서 있는 젊은이들. [최승식 기자]

어떤 조치를 할 계획인가.
“채용 제도에 국한한 접근에는 한계가 있다. 이 세 분야의 문화와 관행,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폐쇄적이고 연고주의적인 문화와 관행이 뿌리 박혀 있고, 채용도 그것에 영향을 받는다. 올해 안에 원인 진단을 하고, 이 세 분야에 대한 ‘맞춤형 조사’를 다시 실시하겠다.”
사례 중 가장 고약하다고 생각한 것은.
“자격증이 필수 요건인 자리에 자격증이 아예 없는 사람을 채용한 경우가 다수 적발됐다. 1차 서류전형에서 탈락시켰어야 할 사람을 최종합격자로 만든 것이다. 채용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기관장이 지목한 사람을 그대로 뽑은 곳도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권익위 조사팀에 따르면 정선군시설관리공단은 공모 절차 없이 고위 간부가 지정한 사람을 그대로 채용했다.)
공공기관의 책임자나 고위 간부 중 상당수가 이른바 ‘낙하산’이라서 채용에도 비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그럴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전문성이 떨어지고, 기관 운영에 대한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연고에 의해 ‘우연한 과실’로 임명이 되면 인사나 운영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주변 청탁을 물리치기 어려울 가능성도 그만큼 크다.”
실무진에 따르면 경찰관들을 현장에 투입한 것이 비리를 확인하는 데 큰 효과를 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 약 80명의 경찰관, 50여 명의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을 투입했다. 수사가 아닌 행정조사이기 때문에 경찰관이 압수 수색 또는 계좌추적 등의 강제적 수단을 쓸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경험과 전문성이 큰 도움이 됐다. 자료 봉인이나 압수 조치가 가능하면 조사가 더 철저히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권익위의 권한을 정하는 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부분을 보완할 계획이다.”
의료·체육·문화예술계의 문제

의료·체육·문화예술계의 문제

문재인 대통령이 여러 차례 ‘채용 비리 근절’을 언급했다. 조사 결과 발표 뒤에 문 대통령이 당부한 것이 있나.
“후속 조치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참모진에게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수사나 징계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추적을 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과거에 해당 기관이나 감독 부처에서 징계 수위를 낮추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엔 끝까지 확인하려 한다. 채용 비리 근절은 이 정부의 핵심 과제다. 흐지부지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은밀하고 교묘하게 이뤄지는 채용 비리의 속성상 내부자 익명 제보가 중요할 텐데.
“권익위는 신고·고발·제보에 실명을 원칙으로 삼는다. 하지만 내용이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높으면 익명 제보도 자료로 활용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신분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는 방법의 하나는 변호사를 통해 신고하거나 고발하는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고발자가 누군지 묻지 않는다.”
정부 조사는 공공 영역에 국한돼 있는데, 채용 비리는 민간 영역에서도 발생한다.
“이번 조사에서 공공기관 파견 용역직에서 민간 기업의 최초 채용 과정의 문제가 포착되기도 했다. 민간 영역의 채용 관련 규정들이 허술한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현재 민간 영역의 공정 채용과 관련된 입법 작업을 하고 있다.”
범위를 넓혀 권익위의 다른 업무와 관련된 질문을 하겠다. 우선 김태우 전 수사관 문제다. 권익위가 공익 신고자 지위는 인정하면서도 불이익 보호 조치는 하지 않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김 전 수사관은 지난달 8일 청와대 관계자들을 공익 침해자로 신고하면서 자신에 대한 대검찰청 징계 등의 불이익 처분 금지를 요청했다. 권익위 보호는 신고 행위로 인한 불이익으로부터 보호하는 조치다. 그런데 김 전 수사관이 검찰로부터 받은 징계는 신고 이전에 진행된 것이었다. 공익 신고와 불이익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김 전 수사관이 최근의 폭로로 인해 공무상 비밀누설 등의 혐의로 처벌을 받게 되면 권익위의 보호 대상자가 되나.
“그렇다. 김 전 수사관이 우리에게 신고한 사안 때문에 불이익을 받게 될 때는 처분 정지 권고와 신변 보호 등의 조치가 가능하다.”
권익위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는데.
“신고와 불이익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돼야 보호 조치를 발동하도록 법이 돼 있다. 법을 어길 수는 없지 않은가.”
최근 손혜원 의원 사건으로 국회가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을 제정할 때 이해 충돌 방지 부분을 삭제한 것이 다시 문제가 됐다. 권익위 입장은 뭔가.
“권익위가 처음 만든 법안은 부정 청탁, 금품 수수, 이해 충돌 방지의 세 영역으로 돼 있었는데, 국회의원들이 이해 충돌 부분을 빼버렸다. 내가 셋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이 사라졌다. 공직자의 이해 상충 행위를 막기 위한 별도의 입법을 검토하고 있다.”
위원장 취임 직후 국제투명성기구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 부패인식지수(CPI) 순위를 30등 안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는데 지난해 45등에 그쳤다. 목표 달성이 가능한가.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정·경 유착이 크게 줄지 않았다고 보는 게 점수를 잃는 주요 원인이다. 그래도 한 해 사이에 6단계가 상승했다. 문 대통령 임기 내에 30등 이내로 진입이 가능하도록 노력하겠다.”

박은정 위원장은…

경기여고, 이화여대(법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유학했다 . 이화여대 법대와 서울대 법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주로 생명윤리와 인권 문제를 연구했다. 한국인권재단 이사장, 서울대 생명윤리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