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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넷플릭스 공습’에 11년 전 SS동맹을 소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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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TV 종말’ 시대, SKT는 왜 지상파 TV와 손을 잡았나 

차량공유서비스 우버를 잡겠다고 100년 라이벌 벤츠와 BMW가 손을 잡는 세상이다. 아예 기존 판을 뒤엎어 버리는 혁신기업의 등장은 이렇게 으르렁대던 앙숙도 힘을 모으게 만든다. 올초 IPTV(유료 인터넷 TV)를 서비스하는 SK텔레콤(SKT)과 KBS·MBC·SBS 지상파 3사가 손을 잡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유는 하나, 바로 공통의 적 넷플릭스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젊은층을 넘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넷플릭스에서 보고 싶은 콘텐트를 자유자재로 찾아보게 되는 날, 이미 쇠락의 길에 접어든 지상파는 물론 지난 10년간 고공성장해온 IPTV 역시 안방을 내주고 고꾸러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통신사와 방송사간 이종결합을 낳고 있다.

넷플릭스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사극 좀비 드라마 '킹덤'. 이미 문은 열렸다. 드라마 속에서 창궐하는 좀비처럼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는 와중에 SKT와 지상파의 결합이 관심을 모은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사극 좀비 드라마 '킹덤'. 이미 문은 열렸다. 드라마 속에서 창궐하는 좀비처럼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는 와중에 SKT와 지상파의 결합이 관심을 모은다. [사진 넷플릭스]

2019년 1월 3일. SKT와 지상파 3사 사장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한국방송회관에서 공동사업 협약식이 열렸다. 양측이 각각 '옥수수'와 '푹(POOQ)'이란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는 넷플릭스와 유사한 방식의 OTT(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합해 4월중 신규 플랫폼 브랜드를 내놓기로 했다. '넷플릭스에 대항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토종 사업자간 연합 전선 구축'이라는 대대적인 언론 홍보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를 사용할 고객들 반응은 뜨뜨미지근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엔 기대보다 비아냥이 많았다. "위협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만남"이라거나 "이미 빈익빈 국면에 접어든 지상파 콘텐트로 넷플릭스에 대항하기는 무리수"라는 부정적 언급이 대다수였다. "코너에 몰려 나온 고육지책" 정도가 비교적 긍정적 평가였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매일 쏟아지는 넷플릭스의 신규 콘텐트 소식만도 못한 미미한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3일 오후 한국방송회관에서는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 3사와 SK텔레콤 간 플랫폼 공동사업 양해각서(MOU) 체결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최승호 MBC 사장, 양승동 KBS 사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박정훈 SBS 사장. [사진 MBC]

3일 오후 한국방송회관에서는 KBS·MBC·SBS 등 지상파 방송 3사와 SK텔레콤 간 플랫폼 공동사업 양해각서(MOU) 체결식이 열렸다. (왼쪽부터) 최승호 MBC 사장, 양승동 KBS 사장,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박정훈 SBS 사장. [사진 MBC]

SKT와 지상파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무기력하게 넷플릭스에 콘텐트 플랫폼 시장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11년 전을 떠올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 지금의 넷플릭스보다 '더 무서운 놈'이었던 아이폰의 공습에 대항해 결성했던 SKT와 삼성전자의 SS 동맹 얘기다.

넷플릭스 맞서 SKT·지상파 협업 #"8조 거물 대항하기엔 무리" 지적도 #아이폰 첫 등장 때는 삼성과 공조 #비웃음 샀지만 세계 1위 기적 만들어 #고객 불만을 경쟁력으로 바꾼 경험 #이번에도 지상파와 윈윈 가능할까

#무서운 놈의 등장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7년 1월 9일은 세상을 바꾼 날로 기록된다. 스티브 잡스가 미국 샌프란스시코 모스카니 센터에서 열린 맥월드 엑스포 컨퍼런스의 기조연설 중 애플의 야심작 아이폰을 공개한 바로 그 순간 말이다.

당시 전 세계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은 노키아·모토롤라·소니에릭슨, 그리고 삼성전자가 80%를 점유하고 있었다. 시장을 나눠먹던 글로벌 4강 휴대전화 제조업체 모두가 갑자기 눈 앞에 맞닥뜨린 스마트폰 시대에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했다. 삼성전자도 처음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의 4강 메이커 가운데 아이폰 침공 이후에도 살아남은 건 삼성전자 하나 뿐이다. 삼성전자는 2012년 처음으로 스마트폰 세계 판매 1위에 올라선 이후 화웨이 등 중국 업체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삼성전자를 스마트폰 절대강자로 키운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이폰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통신사와 협업한 SS동맹이 없었다면 삼성전자 역시 절대강자에서 이젠 추억으로만 남은 모토롤라나 노키아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폰 출시 당시 글로벌 4강 휴대전화 메이커 중 오직 삼성전자만 살아났았다. 모토롤라와 노키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맨 아래 파란 색이 삼성전자 점유율.

아이폰 출시 당시 글로벌 4강 휴대전화 메이커 중 오직 삼성전자만 살아났았다. 모토롤라와 노키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맨 아래 파란 색이 삼성전자 점유율.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공개한지 5개월만에, 그러니까 미국에서 정식으로 출시도 하기 전에 애플 주가는 이미 44% 급등할 만큼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당황한 삼성전자의 초기대응은 어찌보면 반(反) 시장적인데다 후진적이기까지 했다. 글로벌 시장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는 국내 시장에 발을 못 붙이게 막는 방법 말이다. 양측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는 없지만 당시 잠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있던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태원 SK 회장에게 "아이폰을 출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는 게 업계의 정설로 내려온다. 물론 애플의 무리한 갑질도 SKT가 돌아서는 데 한몫했다. 애플은 국내 통신사들에게 협상조건으로 3년간 100만 대 이상 매입, 보조금 단독 부담, 통신사 앱 설치 불가 등을 내세웠다. 애플의 무리한 요구에 가장 많은 휴대전화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던 SKT는 아이폰 출시 대신 삼성전자와 함께 한국형 스마트폰 개발에 나섰다. SS동맹의 시작이었다.

시작은 미약했다. 2008년 2월, 삼성전자와 SKT 임원 10여 명이 하나의 목표로 모였다. '타도 아이폰', 다시 말해 아이폰에 대항할 스마트폰을 만드는 게 과제였다. 양사의 영문 첫 글자를 딴 SS팀의 SS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해 11월 옴니아1을 내놨지만 5개월 동안 13만 대를 겨우 팔았을 만큼 시장 반응은 냉랭했다. KT를 통해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기 딱 한 달 전인 2009년 10월, SS팀은 두 번째 작품 옴니아 2를 내놓았다. 옴니아1과 달리 5개월만에 60만 대를 팔았지만 이게 오히려 독이 됐다. 한국 최고의 제조사와 한국 최고의 통신사가 머리를 싸맸지만 잦은 오류와 고장으로 양사의 브랜드 이미지만 갉아먹었다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집단소송을 하겠다는 인터넷 카페도 등장했다. 2011년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2011에 참석한 삼성전자 신종균 무선사업부문 사장이 "옴니아 구매자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다"고 달래야할 정도였다. 당시엔 분명 독(毒)인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가장 빠르게 고객 니즈를 파악하고 충족시키는 계기가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당시 SS팀의 주축멤버였던 조정섭 SK네트웍스 고문은 "통신사와의 협업 덕분에 한국 스마트폰이 경쟁력을 갖추고 글로벌 1등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오직 제조사 중심으로 밀고나간 글로벌 메이커들이 모두 실패했지만 삼성전자는 고객의 불만에 찬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피드백해주는 통신사 덕분에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객과 접점이 있는 통신사와의 협업을 통해 시장에 먹히는 고객친화적인 최상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2010년 1월 다시 가동한 SS팀이 그해 6월 출시한 갤럭시 S는 출시 33일만에 50만 대 개통을 기록한 것은 물론 품질 면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호평받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삼성전자가 아이폰의 유일한 적수로 올라서는 결정적 전기였다. 삼성전자만 스마트폰 최강자로 올라선 게 아니다. 2011년 3월 SKT의 아이폰 출시로 SS동맹은 막을 내렸지만 2009년말 80만 명에 불과하던 스마트폰 가입자 수가 2011년 3월 1000만, 2012년 8월 3000만, 그리고 지난해 8월 5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통신사도 함께 급성장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비웃음을 기적으로 만든 SS동맹
아이폰의 공습에 모토롤라와 노키아, 블랙베리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와중에 옴니아로 조롱받던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글로벌 1위 기업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넷플릭스의 공습으로 미디어의 지형이 바뀌는 지금 그 시절의 SS동맹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또 10년 전 PC시대의 종말을 고한 아이폰 공습에 삼성전자와 손을 잡았던 SKT가 TV의 종말을 고하는 넷플릭스 공습에 지상파 방송과 다시 손을 잡는 결단을 한 게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옴니아로 아이폰에 맞서겠다는 SS프로젝트에 모두들 코웃음을 쳤던 그때처럼 지금도 옥수수와 푹의 결합을 놓고 '푹수수' 운운하며 비웃는 목소리가 더 크다. 넷플릭스에 맞선다는 게 한마디로 가당치도 않다는 반응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적으로 1억3700만 명(2018년3분기 기준)이 넘는 사용자를 확보한 넷플릭스는 미국에선 이미 2017년에 성인(18~59세) 사용자의 유료 방송 가입률을 뛰어넘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케이블TV 가입자 수를 넘어서면서 코드커팅(케이블 선을 잘라버린다)에 이은 TV 대체 현상이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규모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넷플릭스는 2018년 콘텐트 제작에만 8조원을 쏟아부으며 100억원 수준의 옥수수를 압도하고 있다.

옥수수는자체 제작 콘텐트를 점점 늘리고 있다. 하지만 100억원 수준으로 지난해 8조원을 쏟아부은 넷플릭스완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진 SKT]

옥수수는자체 제작 콘텐트를 점점 늘리고 있다. 하지만 100억원 수준으로 지난해 8조원을 쏟아부은 넷플릭스완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진 SKT]

넷플릭스는 2016년 1월 한국 런칭 당시 큰 주목을 못 받았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며 100만 사용자를 넘었다. 특히 넷플릭스가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자체 제작 시리즈물 '킹덤' 공개 후 넷플릭스를 서비스하고 있는 LGU플러스 가입자가 급증할 정도로 한국시장에서 상승 탄력을 받은 상태다.

가파르게 늘어나는 넷플릭스 가입자. 2018년초 34만명이었지만 연말엔 127만명을 넘어섰다.

가파르게 늘어나는 넷플릭스 가입자. 2018년초 34만명이었지만 연말엔 127만명을 넘어섰다.

이번에 통합한 옥수수(946만명)와 푹 사용자(370만) 수를 합하면 무려 1300만 명으로 넷플릭스를 압도하지만 사용자의 체감은 전혀 다르다. 옥수수는 사실상 SKT 가입자에게 공짜로 제공하는 부가 서비스 개념에 머물고 있고, 푹은 지상파 콘텐트 VOD(원하는 시간에 TV 다시 보기)에 한정돼 존재감이 미미한 상황이다. 게다가 아직은 넷플릭스의 주 시청층이 20~30대에 머물러 있지만 SNS와 유튜브에서 보여준 고령층의 놀라운 적응력을 감안할 때 한국에서 넷플릭스가 전 세대를 아우르는 위협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비관적 예측에도 불구하고 SKT는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박정호 사장은 "고작 돈 벌어서 실적 올리겠다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자본을 유치하고 K콘텐트가 산업이 되고 국민소득을 높이는 게 내 진정성(진정한 목표)"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한국의 콘텐트 역량은 강하지만 이를 제대로 산업화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라며 지상파와의 통합 서비스 협약이 미디어 소비 형태를 확 바꿔놓는, 다시 말해 판을 바꾸는 계기가 될 거라고 얘기한다.
『넷플릭스하다』의 저자 문성길은 "기술보다 소비자에 초점에 맞춰야 한다"며 콘텐트 비즈니스에서 소비자와의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게 지상파의 약점으로 지적했다. 이런 면에서 SKT가 과거 SS동맹에서 했던 역할을 다시 기대해볼 수 있다. SKT의 이번 동맹이 SS동맹을 재현하는 변화를 몰고올지, 아니면 무기력한 보여주기 동맹에 그칠 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