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묘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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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프랑스 여배우「브리지트·바르도」(BB)가 동독의「울브리히트」제일 서기를 만났다. 그는 반가운 나머지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바르도」양,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면 말해봐요.』
BB는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했다.
『있고 말고요. 베를린 장벽을 말끔히 허물어 버리면 동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들 환호할 거예요.』
「울단리히트」는 뜻밖에도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옳은 말이야. BB를 보고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베를린 벽을 무너뜨리면 모두들 도망가고 그대와 나만 남을 것 아닌가. 다른 얘기도 있다. 동독 쪽에서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두 병사가 주고받는 말이다.
『우리가 경비병이 된 것은 참 행복한 일이야.』다른 병사가 대꾸했다. 『사회주의 독일의 노동자, 농민들을 내가 지켜준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뿌듯해.』그 옆의 병사는 그 말을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옳은 말이야. 오늘밤은 달이 참 밝지.』정작 달 없는 밤에 이들이 무슨 일을 할지는 그들만이 아는 일이다.
1961년 8월19일, 그 베를린 장벽이 생기고 나서 5일째 되는 날 동베를린 쪽에 사는「롤프·아반」이라는 42세의 남자는 자기집 2층 창 너머로 뛰어 내렸다. 그가 떨어진 자리는 서베를린쪽 이었다. 물론 그는 죽고 말았다. 장벽이 생기고 나서 최초의 희생자였다.
오늘 그 자리엔「아반」의 뒤를 좇아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묘비명이 서있어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그 중에는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수도를 뚫고 나온 사람들, 길이 32m,높이 1.7m의 땅굴을 파고 탈출한 사람들, 철조망을 막무가내로 헤치고 나온 사람들, 어떤 서독 청년은 동독의 변인을 자동차의 밑바닥에 묶어 무사히 탈출했다.
바로 그 베를린 장벽을 철거할 수도 있다는 말을 최근 다른 사람도 아닌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다른 곳도 아닌 서독에서 했다. 전후 반세기, 냉전의 상징물인 베를린 장벽이 사라진다면 세계의 시민들은 비로소 세상 달라진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최후 상징물은 바로 한반도에 살벌하게 남아있다. 휴전선을 무너뜨릴 정치가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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