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총재 광주발언 왜 나왔나|광주 분위기에 밀려 강경선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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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26 총선 이후 제1야당 총재로 온건협상 노선을 꾸준히 견지해온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강경투쟁 노선으로 회귀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시도지부 결성대회 참석차 3일 광주에 내려온 김총재는 전남교육대에서 대중연설을 통해 5공 청산과 민주화를 요구, 이 같은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내년 봄 노정권 종식투쟁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총재가 밝힌 5공 청산과 민주화의 내용들은 지금까지 주장했던 것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행동지침과 시한을 천명했다는 점에서 강경선회를 느끼게 한다.
김총재가 이날 연설에서 밝힌 5공 청산의 조건들은 전·최씨의 사과 및 증언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골자는 역시 정호용 의원의 공직사퇴로 집약되고 있다.
김총재는 정의원을 『과거만이 아니라 지금도 5공 청산과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반민주 수구세력의 총지휘자』라고 규정, 초점을 정씨의 공직사퇴에 맞추고 있다.

<6개월 시한선언>
김총재는 『청와대 회담이 경우에 따라서는 노대통령과의 마지막 회담이 될 수 있다』며 『여기서 해결이 안되면 앞으로 중진회담도 해봤자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해 청와대 회담이 이 문제에 대해 협상하는 마지막 기회임을 강조하고 있다.
김총재가 이처럼 정의원의 공직사퇴 문제를 광주 문제 해결에서 불가피한 조건으로 내걸며 배수진을 치고 나온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표면적인 이유는 광주 현지의 분위기다. 광주 쪽의 강경세력들은 김총재가 현 정권과 협력하는 인상을 보인 점, 정의원 문제를 협상용으로 이용하는 듯한 인상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해 왔다.
특히 금년 들어 전·최씨의 증언만을 남겨둔 채 사실상 특위활동이 중단되고 3·10 노-김대중 회담에서는 김총재가 정의원 문제를 양해해 달라는 노대통령 말에 반론을 제기치 않은 점 등이 광주 시민들을 자극시켰다.
심지어 광주 현지에는 『평민당은 각성하라』는 구호가 시위현장에서 나왔고, 『평민당이 광주를 팔아먹는다』는 말까지 오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철규군 사건으로 재야 운동권 세력들이 광주에 모여 평민당을 포함한 제도정치권을 배척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김총재나 당직자들이 『정의원 사퇴 주장은 더 이상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할 권리도 없다』고 하는 말 등이 이 같은 현지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보다 표면적 이유라면 정의원 사퇴를 요구하는 내면적 이유는 다소 복잡해진다.
중평을 연기시킨 노-김 청와대 회담 후 여당과의 협조체제구축 등 화해정치를 구사해온 김총재가 정의원 문제에 대해 극한 대결을 불사하며 강하게 나오는 것은 그와 같은 협력체제를 저지·붕괴시키려는 세력이 여권 안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협상여지는 남겨>
최근 들어 김총재를 비롯한 당직자들이 정의원을 5공 수구세력으로 지목·비판하며 여권내 온건파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해왔으며 이날 연설에서도 정의원을 『5공 청산과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는 반민주 수구세력의 총지휘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이다.
이와 함께 김총재는 여권내부의 파워게임을 이용할 경우 정의원 퇴진은 받아낼 수 있는 카드라고 판단한 듯하다.
실제로 평민당쪽에는 지난번 정의원 퇴진파동 당시 『정의원을 공직에서 사퇴시킬 것』이란 여권으로부터의 신호가 왔었다고 한 당직자가 실토한 바 있다.
김총재가 이날 강수로 배수진을 친 것도 여권으로부터의 당시 신호가 아직도 유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김총재가 곁으로는 온갖 강경한 표현을 구사해 정의원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 6개월 여의 시간여유를 주고 있는 점등을 고려해보면 강경속에 협상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이용 말라 시위>
○…4·26총선 이후 만1년 만에 평민당 시도지부결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온 김대중 총재는 도착 즉시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이철규군 빈소에 들르는 등 빠듯한 일정에 따라 강행군.
지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의 열광적이었던 광주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환영인파도 없었으며 일행의 차를 보고 손을 흔드는 사람조차 드물게 눈에 띄는 등 냉랭한(?) 반응이 주류.
특히 첫 행사인 망월동 묘지참배 과정에서 5월부상자동지회회원 등 유가족단체관련자 30여 명이 길을 막고 『평민당은 각성하라』 『우리의 희생을 이용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김총재 일행의 참배를 저지하고 나서 평민당 당원과 밀고 당기는 몸싸움까지 벌였다.
이러한 광주분위기를 의식하여 김총재는 당초 예정했던 김유신 장군 사당 참배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이철규군 사건현장 4수원지를 답사하는 등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이 역력.
그러나 삭발하고 애국결사대란 머리띠를 두른 학생 수십 여명이 김총재의 빈소 입장을 몸으로 저지하는 바람에 간신히 빈소로 들어가 분향.
김총재가 전남대 병원에 도착하기 전 평민당 당원 수십 여명이 사전에 빈소로 들어가려 했으나 학생들이 이를 몸으로 막았고 곧이어 김총재가 도착하자 일부 학생들은 물이 담긴 물통 서너 개를 김총재를 향해 던졌고 또 어떤 학생은 바닥의 모래를 한 움큼 쥐어 뿌렸는가 하면 어떤 학생은 병을 들고 뛰쳐나오려는 것을 다른 학생들이 말리는 등 대소란.
머리에 물을 맞은 김총재는 애국결사대의 대표 학생과 입구에서 즉석 면담했는데 그 학생은 김총재에게 『고문 치사를 전제로 한 국정조사를 하라』는 등 5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
이에 김총재는 『자신도 익사했다는 검찰의 수사발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으며 당력을 총 집중해 진상을 철저히 밝히겠다』고 다짐한 뒤 학생의 허락을 받고 분향소에 가까스로 입장.
분향소에 들어간 김총재는 방명록에 『반드시 진상을 밝힐 것을 영령 앞에 맹세합니다. 김대중』이라고 쓴 뒤 분향했는데 분향소를 나오면서 이철규군 어머니를 만나자 함께 껴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광주=이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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