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사방팔방 꽉 막힌 한·일 관계, 손 놓은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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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일 관계가 사방팔방으로 꽉 막혀 버렸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과 관련된 양국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에 대한 우리 해군 함정의 레이더파 발사로 켜켜이 오해까지 쌓였다.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퇴수구가 막혀 그릇 씻은 물이 넘쳐 흐르는데 막힌 관을 뚫을 의지도, 아이디어도 없어 보인다. 손놓고 있는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의 태도가 그렇다.

위안부·강제징용·초계기 등 첩첩산중 #해법 못 찾으면 ‘동북아 외톨이’될 우려

어제 강경화 외교장관이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 빈소를 조문했다. 강 장관은 “할머니가 처절하게 싸우셨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날 같은 빈소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김 할머니를) 떠나보내게 돼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모두 위안부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인식의 표현이다. 하지만 현 상황에 대입해 보면 일본에 대해 더욱 각을 세워 대치하겠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사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로 나아갈 어떤 전략이나 액션플랜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1일 화해·치유재단 설립 허가를 취소했다. 이 재단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치유를 위해 2016년 7월 설립됐다. 정부는 조만간 이 재단의 해체 절차에 들어간다. 이에 따라 70여 년 전의 과거사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한·일의 모든 노력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부는 재단 설립을 위해 일본이 제공한 10억 엔 가운데 쓰고 남은 잔액 60억원의 처리 방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만나 이 재단의 해산 의사를 통보한 지 넉 달이 지났는데도 외교부는 후속조치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가나스 겐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재단 해산은 한·일 합의에 비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일제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과 일본의 반발에 대한 정부 대책도 무언지 모르겠다. 일본 측이 외교적 협의를 요청해 왔지만, 정부는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과거 양국 정부가 이미 청산한 사안을 한국 정부가 파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 워싱턴 등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이 외교적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있다는 인식이 크다. “재협상도, 중재위원회·국제사법재판소도 안 가겠다니 도대체 한국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퍼지며 국제 여론전에서도 밀리고 있다.

한·일 해군의 레이더 갈등도 그렇다. 조난한 북한 어선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인데도 감정만 증폭시킬 뿐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경두 국방장관이 해군작전사령부를 찾아 “일본의 위협 비행에 강력 대응하라”고 한 장면은 군의 입장에선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교의 실종’이라는 점에선 씁쓸한 우려를 남겼다. 이대로라면 한 달 뒤 3·1절은 한·일 간 파국의 정점이 될 수도 있다.

양국 과거사 문제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일본에 있다. 그러나 한·일은 이를 치유하고 역사를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앞으로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양국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뿐더러 경제 교류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유연하고 대국적인 외교 전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