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는 무엇을 바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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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everything)."

거스 히딩크 감독이 호주 대표팀을 맡고 난 후 무엇이 바뀌었느냐는 물음에 호주 일간지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마이클 코커릴 기자는 이렇게 답했다. 지난해 7월 호주팀 감독으로 취임해 32년 만에 '캥거루와 럭비의 나라' 호주를 2006 독일월드컵 본선에 진출시켰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월드컵 본선 16강에 올려놓은 히딩크는 4년 전의 한국에서처럼 호주에서도 기적을 창출한 영웅이었다.

감독을 맡은 지 1년도 안 된 히딩크가 호주 선수들과 체계적으로 훈련할 수 있었던 기간은 지난해 11월 우루과이와의 독일월드컵 지역예선 플레이오프를 전후한 두 달여와 월드컵 개막을 앞둔 3주일이 전부였다. 이 짧은 기간에 히딩크는 한국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토털 풋볼의 정신과 육체를 '사커루'들에게 심어놓았다.

호주의 프리랜서 기자인 마이클 로버츠는 히딩크가 호주팀에 가져다준 변화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강인한 체력이다. 한국에서처럼 장기간에 걸쳐 파워 프로그램을 할 수는 없었지만 독일월드컵 직전 3주간을 강도 높은 체력 훈련에 쏟았다. 코커릴 기자는 "호주 선수들이 그때처럼 힘들어 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브라질.크로아티아 등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만날 강호들에게 경쟁력을 가지려면 경기 막판 15 ̄20분에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원래 신체 조건이 좋은 호주 선수들이기에 단기간의 훈련에도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팀 컬러의 변화다. 기존의 호주팀은 뛰어난 체격 조건을 바탕으로 몸싸움과 롱패스에 의존하는 '순진한' 축구를 구사했다. 감독으로 부임한 히딩크는 우선 선수들의 기존 포지션을 '파괴'했다. 선수들에게 잇따른 포지션 변경을 요구하며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들을 발굴해 팀을 재조직했다. 좌.우와 중앙을 오가며 활약하는 만능 미드필더 제이슨 컬리나는 그가 발탁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과정에서 감독의 독단을 지적하는 언론의 비판도 있었다. 이러는 동안 호주팀은 짧은 패스를 통해 세련된 전술을 구사하는 팀으로 변해갔다. 활발한 움직임으로 그라운드 전체에 걸쳐 압박을 펼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포메이션에도 변화가 있었다. 히딩크 이전 호주팀은 4-4-2를 고집하는 '경직된' 팀이었다. 히딩크는 여기에 3-5-2 등 다양한 포메이션을 익히도록 해 상대에 따라 적절하게 포메이션을 변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로 무엇보다 히딩크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선수들에게 '우리도 강팀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19일(한국시간) 브라질과의 조별리그 경기를 앞둔 히딩크는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히딩크는 "많은 사람이 우리가 비기면 성공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는 비기기 위해 경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브라질을 꺾을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호주는 브라질 주전선수가 거의 빠진 2001 컨페더레이션스컵(1-0 승)을 빼고는 브라질을 이겨본 적이 없다. 0-6으로 지기도 했다. "이전까지 강팀을 만나면 뒤로 물러나며 공을 돌리는 것이 호주의 습관이었다"고 로버츠 기자는 말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예전의 호주팀이 아니었다. 우루과이를 누르고 독일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낸 후 2004 유럽선수권 챔피언 그리스를 1-0으로 꺾었고 독일월드컵 개막 직전엔 우승후보 네덜란드와 1-1로 비기면서 자신들도 강팀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다. 비록 0-2로 졌지만 브라질은 호주의 패기 넘치는 플레이에 내내 고전했다. 히딩크는 경기 후 "우리는 오늘 경기 내용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이 같은 방식은 4년 전 그가 한국의 4강 신화를 연출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다. 결국 히딩크는 자신의 축구철학으로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들어낸 셈이다.

월드컵 이후 러시아 감독으로 떠나는 히딩크에 대해 'TNT 매거진'의 샘 비숍 기자는 "슬프다.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호주인들이 그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다"고 코커릴 기자는 "그가 완벽한 지도자는 아니다. 운도 많이 따랐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주전 스트라이커이자 주장인 마크 비두카는 "히딩크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며 충성 맹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이별을 준비할 단계는 아닌 듯하다. '여전히 배가 고플' 것이 분명한 히딩크가 16강 토너먼트에서 또 다른 기적을 연출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슈투트가르트=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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