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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 면제’ 만능열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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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 차장

하현옥 금융팀 차장

①내 돈을 나를 위해 쓴다. ②내 돈을 남을 위해 쓴다. ③남의 돈을 나를 위해 쓴다. ④남의 돈을 또 다른 남을 위해 쓴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선택할 자유』에서 구분한 돈을 쓰는 네 가지 방법이다. 그는 정부 지출을 통한 시장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스학파의 대척점에 섰다. 당연히 ④번을 가장 마뜩잖아 했다.

①에서 ④로 갈수록 소비는 무책임해진다. 특히 ④번의 경우 지출자가 돈을 아낄 이유가 없다. 소비 수혜자의 만족은 뒷전일 공산이 크다. 오히려 돈 쓰는 사람의 이익이 우선순위에 놓일 수 있다. 낭비와 비효율이 생긴다.

나랏돈을 쓰는 일은 ④번에 가장 가깝다. 무책임과 도덕적 해이에 따른 세금 낭비가 발생하는 이유다. 이를 막는 안전장치가 국가재정법상의 ‘예비타당성(예타) 조사’다. 총 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면서 국가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건설사업이나 국가연구개발사업은 경제성과 사업성을 검토해 집행 여부를 판단한다. 1999년 도입 이후 2017년까지 지방자치단체(지자체) 사업 767건 중 37%를 ‘사업부적합’으로 판정하며 국고 누수를 막았다.

그래도 바가지는 샜다.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라는 만능열쇠 탓이다. 지역 균형발전이나 재해복구 지원 등 국가 정책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는 사업이 해당된다. 이 만능열쇠는 사업 진행을 막을 껄끄러운 절차 회피나 경제성 없는 사업 추진에 동원됐다. 이명박 정부의 4대 강 사업이 대표적이다. 막대한 건설비를 투입하고도 골칫거리가 된 강원도 양양공항과 전남 영암의 F1 경기장도 마찬가지다.

경기 둔화의 우려에 직면한 문재인 정부도 만능열쇠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광역단체별로 공공 인프라 산업을 1건씩 선정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하겠다고 밝혔다. 각 지자체는 총 61조원 규모의 33개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신청했다. 결과는 29일 국무회의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가라앉는 경기에 내년 총선까지 정부의 조바심을 키운 모양이다. 나랏돈을 쓰며 경제성은 따지지도 않고 일단 땅부터 파게 생겼다. 경기 부양 목적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는 하지 않겠다던 공약도 온데간데없다. 4대 강 사업을 비판했던 서릿발이 무색할 정도다. “경제가 나빠지면 중간반환점을 돌 때쯤 토건 오케이, 토건 급발진이다. 진보든 보수든 패턴은 같다.” 진보 경제학자 우석훈의 말대로다. 그 값비싼 청구서의 뒤치다꺼리는 또다시 국민의 몫이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