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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 맛집 즐기고 해외여행 자주 가면 충족될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 (26)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사람들은 무료함을 가장 두려워했다. 걷는 순간조차 무료해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는다. 인류는 모바일 테크놀로지를 얻은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중앙포토]

사람들을 관찰해 보니 사람들은 무료함을 가장 두려워했다. 걷는 순간조차 무료해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는다. 인류는 모바일 테크놀로지를 얻은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중앙포토]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최근 사람들을 관찰해본 결과,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무료함이다. 사람들은 이제 걷는 순간조차 무료해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는다.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능하다면 꿈속에서도 보겠다고 할 것이다. 인류는 모바일 테크놀로지를 얻은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무료함의 성질은 ‘느림’이다. 이 느림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의 기업가 앨런 머스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35분이면 갈 수 있는 교통수단 하이퍼루프를 만드는 중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쪽이다. 빠른 것, 과감한 것, 혁신적인 것 말이다.

혁신은 기존 것들을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린다. 시속 1200km의 하이퍼루프 옆에서 시속 300km의 KTX는 초라하다. 이 초라함이 경쟁심을 부추긴다. 매년 새로 출시되는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버전 2가 등장하면 버전 1은 삽시간에 구시대의 유물이 된다. 소비자들은 이 속도에 맞추기 위해, 생산자들은 그 속도를 한층 더 끌어올리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다.

이러한 사회 기풍 속에서 느림이 인정받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속도 경쟁은 언젠가는 멈춘다. 앞서 산업을 발달시켰던 경제 강국들이 끝내 저성장 상태에 이른 것을 보라. 그럴 때 공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무료함에 미리 익숙해져 있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외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많다. 그중 하나가 균형에 관한 문제다. 요새 사람들은 너무 열심히 논다. 주말에는 맛집 찾아가고 연휴에는 해외여행을 간다. 소문난 곳에는 가보고 가본 곳에서는 사진을 찍어 남겨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워라밸’을 맞추는 일일까? 균형이란 100만큼 일했을 때 100만큼 노는 것이 아니라, 100만큼 무언가를 했다면 100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닐까?

동의한다면, 이런 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보랏빛 등나무 꽃. [사진 pixabay]

보랏빛 등나무 꽃. [사진 pixabay]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럭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上下로
발을 쳤고
그 揮帳(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群落地(군락지)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밑 老人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慶會樓(경회루)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雙(쌍)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垂直(수직)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虛空(허공)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急(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

김영승, 「흐린 날 미사일」 전문

일상을 돌이켜 회사 일과 집안일, 경조사와 자기계발 등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과연 우리는 힘이 센가? 어쩌면 시인은 삶은 물리법칙과 달리 속도가 빠를 때 오히려 힘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pixabay]

일상을 돌이켜 회사 일과 집안일, 경조사와 자기계발 등으로 가득 찬 일상에서 과연 우리는 힘이 센가? 어쩌면 시인은 삶은 물리법칙과 달리 속도가 빠를 때 오히려 힘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진 pixabay]

바쁘니까 핵심만 읊어볼까. 아, 아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바빴다. 우리 이제, 바쁘다는 핑계로 뭔가를 서둘러서 하지 말자. 느릿느릿하게 가보자.

제1연부터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느릿느릿 걷는데 힘이 셀 수가 있나? ‘F=ma,’ 그러니까 힘은 속도와 비례한다는 것을 달달 외워온 우리에게는 알쏭달쏭한 얘기다. 어쩌면 시인, 삶은 물리법칙과 달리 속도가 빠를 때 오히려 힘이 약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돌이켜 본다. 회사 일과 집안일, 동료와 친인척의 경조사와 아침 5분 외국어 공부를 비롯한 틈새 자기계발, 몸매 가꾸기와 골프 연습하기와 동창회 나가기와 외국 여행하기로 가득 찬 일상에서 우리는 과연 힘이 센가?

2연의 마지막 행도 눈여겨 볼만 하다. 시인은 등나무 휴식처에 앉아 있는 것을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몹시 바빴던 일상이 그리 자랑스럽지는 않았다는 소회일 것이다. 다음 연의 마지막 행도 같이 읽어 보자. 등나무 꽃이 시인을 세상으로부터 가려주는 지금, 그는 거기에 숨어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참 한가롭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인데, 읽는 것만으로도 어째 숨통이 트인다.

가장 눈여겨볼 것은 ‘수직’이란 단어가 포함된 연이다. 속도는 수직을 싫어한다. 사람은 가만히 서 있을 때는 90도로 서 있지만 시속 60km에 육박하는 수상스키 정도의 속도로 움직이려면 약 45도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울기는 더 심해진다. 시속 130km에 달하는 스켈레톤 선수는 아예 누워서 간다.

등나무는 무료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그곳에서 꽃을 피웠을 것이다. 등꽃은 느림의 상징이다. 대저, 무료한 자만 그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시인, 바닥까지 수직으로 드리운 이 꽃들의 구도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급한 일? 그런 게 있었다면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아름다움이다.

전새벽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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