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법원 문 닫아야" "양승태 책임졌어야"···쪼개진 법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전 영장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오고 있다. 우상조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전 영장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오고 있다. 우상조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 24일 법원은 다시 쪼개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분노에 찬 규탄과 “당연한 순서다”라는 결연한 목소리가 판사들에게서 나왔다. 지법의 한 판사는 “법원에 정말 큰일이 났다”고 표현했다.

양승태 구속 놓고 내부 분열·반목 심화 #검찰, 공식적 '안타깝다', 속으론 '천만다행'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판사들이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을 예측하지 못했다. 불구속 수사·재판 원칙을 검찰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데다 양 전 대법원장의 혐의가 구속 사유를 충족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비판하는 판사조차 영장 기각을 점쳤다.

"법원, 문 닫아야 한다" 

이 때문에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은 판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 비판적인 판사들은 “우리 스스로 법원의 신뢰를 던졌다”고 밝혔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원이 문을 닫아야 한다”며 “업무수행 중에 일어난 일이고 충분히 해석 여하에 따라 아직 달라질 부분이 많은데 지금 단계에서 피의자의 방어권을 제한할 수 있는 구속 조치를 취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고법 부장판사는 “구속 사유 중 하나로 ‘증거인멸’을 들었는데 한 나라의 대법원장까지 한 사람의 인품을 그 정도로밖에 안 보는 것인가”라며 “사법부 수장은 국민들의 신뢰 측면에서 어쩌면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사람인데 ‘대통령도 구속시켰으니 대법원장도 구속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어떻게 바로 적용할 수 있나”라고 비판했다.

사법부가 양 전 대법원장에게 ‘유죄 낙인’을 찍은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잘못된 것이지만 국민들은 구속 자체를 유죄로 여긴다”라며 “공방의 여지가 있는 혐의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구속을 시키면 앞으로 양 전 대법원장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다 짜여진 각본 아닌가"  

판사들조차 스스로 법리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요소가 개입된 결과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미 위에서 다 정해놓고 한 거 아니겠나”라며 “법원이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양 전 대법원장을 최후의 희생양으로 바친 것”이라고 말했다.

고법의 한 판사는 “이제 양승태 대법원에서 판결이 났던 이석기(전 통진당 의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민주노총 사건 관계자들이 모두 재심을 청구할 가능성이 크다"며 "처음부터 거기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판사들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여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이 '특별재판부' 카드를 꺼내들자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된 데 이어 양 전 대법원장도 구속됐다며 상관관계를 의심스러워 하는 의견도 내놓는다.

"양승태 구속, 정치적으로 해석될 문제 아냐"  

사법농단 의혹으로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24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민중당 관계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뉴스1]

사법농단 의혹으로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24일 오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민중당 관계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을 지적했던 판사들은 “정치적 의도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지법의 한 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저지른 사안의 중대성을 떠나 사법부의 수장이 구속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하지만 더 걱정은 이번 구속이 정치적인 행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은 구속 사유에 나온 것처럼 범죄 혐의가 구체적인 증거로 주요하게 입증됐다”며 “또 증거인멸의 우려는 개인의 지위보다 그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판단 여부가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원칙에 따라 결정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지법의 판사도 “양 전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는 의혹을 어떻게 덮고 가릴 수가 있겠나”라며 “이미 수사가 시작됐다면 다른 피고인과 똑같은 입장에서 구속영장심사도 진행되고 재판도 진행되는 게 현재 사법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반성일 것”이라고 말했다.

"양승태, 먼저 책임지고 나선다고 했어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10월 28일 검찰 구속 후 첫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해 10월 28일 검찰 구속 후 첫 소환조사를 받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서울 서초구 중앙지검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부가 이번 사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양 전 대법원장으로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지법의 한 판사는 “결과적으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지금까지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사법부 내에 없었던 만큼 ‘수장’이 책임지는 게 신뢰 회복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양 전 대법원장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면 구속까지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 고위 법관은 “양 전 대법원장이 뒤로 빠져 있는 사이 임종헌 전 차장을 비롯한 다수의 자기 사람들이 ‘가지치기’되지 않았나”라며 “결국 안타깝게도 양 전 대법원장 스스로 자기를 지켜줄 사람들이 사라지도록 방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부 내에 ‘양승태 사단’이 남아있었다면 구속을 조금이라도 방어할 수 있지 않았겠냐는 취지다.

"이제 우리도 검찰처럼 줄 잘 서야"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는 일단락이 되겠지만 법원의 정치화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으로 ‘진영 논리’가 더 고착화됐기 때문이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항상 검찰을 보면서 줄 서기 한다고 비판했는데 이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판사들은 안 그래도 된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는데, 이제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싶다”고 밝혔다.

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누구나 수긍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면 이번 기회에 잘못된 부분을 털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가 이렇게 큰데 재판이 아니라 구속영장심사 단계에서 이 같은 판단이 나온 것은 내부 스스로의 반목과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태 키운 현직 대법원장도 책임져야" 

24일 오전 김명수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연합뉴스]

24일 오전 김명수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연합뉴스]

이와 별개로 일각에서는 현 대법원장인 ‘김명수 책임론’도 나오고 있다.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자기 손에다 피 묻혔으면 자기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라며 “김 대법원장도 이 사태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사실 이렇게까지 이번 일을 키운 것은 현 대법원장이 아닌가”라며 “조직의 내부 문제를 검찰의 손을 빌려서 이렇게 처리하는 게 맞는 것인지 그 부분에 대해 도저히 동의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식으로 무너진 신뢰가 다시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열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대법원장이 이를 예상 못했다면 무능한 것이고 예상했다면 지나치게 포퓰리즘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출근길에 김 대법원장은 대국민 사과를 하며 “어떤 말씀을 드려야 우리의 마음과 각오를 밝히고 또 국민 여러분께 작으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을지 저는 찾을 수가 없다”며 “다만 저를 비롯한 사법부 구성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겠다. 그것만이 어 어려움을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고 그것만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최소한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행' 검찰 "영장 기각됐으면 검찰에도 역풍 불었을 것"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수감된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문무일 검찰총장이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수감된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문무일 검찰총장이 출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이날 검찰은 공식적으로 "안타깝다"는 입장을 냈지만 내부적으로는 수사 흐름이 꺾이지 않아 안도하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중앙지검 윤석열 검사장은 이날 "수사 책임자로서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법원이 과연 영장을 발부할지 고민스러웠는데 다행"이라며 "2월 인사 앞두고 수사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었는데 양 전 대법원장의 영장이 기각됐으면 법원도 그렇지만 검찰에도 '수사 제대로 했느냐'는 역풍이 만만찮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연·김기정·박사라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