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2035

부끄러움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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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송우영 JTBC 사회2부 기자

송우영 JTBC 사회2부 기자

“좋은 기사 많이 쓰세요. 저는 일이 많아서요.” 며칠 전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에게 인사를 갔다가 들은 말이다. 기자를 하면서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법원 담당 기자가 부장판사의 명함조차 받기 힘들 정도로 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명함은커녕 방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어도 세상이 변한다면 잘 적응하는 게 최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빠르게 변하는 게 또 있다. ‘부끄러움’의 조건이다. 우리는 언제 부끄러움을 느낄까. 당연하지만 부끄러울 만한 일을 했을 때다. 하지만 보통은 한 가지 조건이 더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이라는 조건. 나만 알 땐 그러려니 하지만, 남들이 본다면 부끄러운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근데 이 조건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정확히는 없어지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우리끼리의 비밀’이 사라지면서다. 사회 초년병들도 체감할 수 있다. 회사에서 막 대리가 된 친구는 “부서장이 ‘미투’ 열풍 이후 짓궂은 농담을 할 때마다 한 마디를 덧붙이기 시작했다”고 불평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너 그러다 미투 당한다!’고 하겠지만, 우리끼리니까 말인데”다. 불쾌할 수 있는 외모 관련 농담도 “우리끼리니까 말인데”가 붙으면 면죄부가 된다고 스스로 믿는 거다. 남들이 모르면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세상이 바뀐 걸 이 부서장은 모르고 있다. “그 부서에 이상한 상사가 있던데”라는 평판이 회사에 이미 쫙 퍼진 걸 말이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이라는 조건은 사라지고 있다. 부끄러울 일을 하면 바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됐다.

대중 앞에 선 전 사법부 수장도 마찬가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2012년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법관들이 재판의 독립을 굳건히 지킬 수 있도록 어떠한 외풍도 막아내는 버팀목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그는 버팀목이 돼 주기로 한 법관들의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하려 한 정황 때문에 질타를 받고 있다. 법률상 죄가 되는지와 별개로,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들만으로도 부끄러울 일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부끄러운 일을 한 게 없는지 되돌아보자. 나만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막연히 넘어간 건 없는지도 살펴야 한다. 그런 게 있다면 바로 그만둬야 한다. 이건 사법부의 수장이든, 5년 차 기자든 마찬가지다. 그렇게 각자가 부끄러운 일을 덜어내면, 우리 사회가 부끄러워할 일들은 그만큼 줄어들 거라 믿는다. 누가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

송우영 JTBC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