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영화] 조폭의 잔혹과 낭만 사이 줄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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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유하
출연: 조인성·남궁민·천호진·이보영·윤제문·진구
장르: 액션·드라마
등급: 18세
홈페이지: (www.dirtycarnival.co.kr)

20자평: 비열한 세계의 낭만조폭, 그 성장사를 정공법으로 그려낸다.

'비열한 거리'는 그리 새롭지 않은 영화다. 조폭이라는 소재가 그렇고, 조폭의 성장사라는 뼈대가 그렇다. 조직의 중간쯤에서 맴돌다 남들이 꺼리는 모종의 도전적인 업무를 해내 한 단계 신분상승(?)을 이루고, 그 덕에 잠시 탄탄대로를 가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계의 비열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인공은 결코 병두(조인성)가 처음이 아니었다. 한국영화'게임의 법칙'(1994년)은 물론이고 홍콩 누아르와 미국 마피아물까지 훑으면서 이 영화의 친인척을 꼽자면 열 손가락이 금방 동이 날 정도다.

그런데 새롭지 않다고 재미가 없으란 법은 없다. 대중적인 오락물로서 이 영화의 재미는 오히려 그렇게 낯익은 요소를 가장 충직하게 좇는 데서 나온다. 그 공은 우선 드라마의 힘이다. 지나치게 전형적이라는 비판을 들을망정, 병두의 주변에 요모조모 배치된 인물들은 살이 두텁다. 오랜 병을 앓고 있는 홀어머니와 아직 제 앞가림 못하는 두 동생은 조폭의 길에 들어선 병두가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 병두는 이미 나름의 소조직을 이끌고 있다. 합숙생활을 하는 조직원들 앞에서 "식구가 뭐여, 같이 밥 먹는 입구녕이여"라고 병두가 일갈하는 대목은 '의리와 배신'이라는 조폭 장르의 기본 정서가 싹틀 텃밭을 탄탄하게 일군다.

사실 이 드라마에는 '영화 속 영화'라는 새로운 장치가 있긴 하다. 영화감독 지망생 민호(남궁민)는 강렬한 영화 소재를 찾아 초등학교 동창인 병두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덕분에 만들어진 민호의 데뷔작은 나중에 병두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족쇄가 된다. 하지만 민호의 영화가 그렇게까지 병두에게 치명적인지 영화 속 묘사의 개연성은 불충분하다. 민호 쪽 얘기가 좀 더 발전됐더라면 영화를 위해 친구의 비밀을 팔아먹는 감독의 비열함이 조폭의 비열함과 충분히 대비를 이룰 만한데, '비열한 거리'의 초점은 이런 새로운 도전을 피해간다.

대신 민호의 역할은 다른 데서 주목할 만하다. 조폭이라는 비일상적인 일을 하는 남자가 가장 일상적인 욕망과 마주치는 접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민호에 이끌려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 나간 병두가 평범한 회사원.주부로 보이는 동창들과 쑥스러운 듯 어울리는 장면은 조폭의 일상에서 참으로 희한한 풍경이다. 민호의 배려 덕에 여기서 병두는 전부터 좋아했던 동창 현주(이보영)와 다시 만난다. 현주의 직장인 서점을 불쑥 찾아가 알콩달콩 데이트 비슷한 것을 시작하고, 현주를 집에 데려와 '어머님' '형수님'소리가 오가는 대목에서 병두는 조폭이라기보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생활인이다. 아니, 여느 생활인보다 섬세한 순정파다. 믿거나 말거나, 현주 때문에 다른 여자를 사귀어 본 적 없다는 병두의 고백은 조폭이라는 거친 외양의 안쪽에 자리한 낭만적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유약한 낭만성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조폭세계에서 살아남기에는 당연히 불리한 성품이다. 어쩌면 민호의 영화는 돌출적인 계기였을 뿐, 병두는 전통적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스스로의 성품 때문에 성공의 한계에 부닥치는 운명으로 보인다. 이 낭만성은 동시에 관객이 병두라는 조폭에 인간적 연민을 갖게 하는 장치가 된다.

이 대목에서도 '비열한 거리'는 동서양의 성공한 조폭 영화들이 갔던 길을 충실하게 되밟는다. 고전영화 '대부'의 명대사가 한때 직장인의 처세론으로 인용되곤 했듯이, 병두의 흥망성쇠 드라마는 (범죄와 폭력을 괄호 안에 묶는다면) 성공 지향적 조직 내부의 비정한 생존논리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여지를 적잖이 품고 있다.

액션 역시 이 같은 드라마의 어조와 호응을 이루는 점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 초반부 진흙 범벅이 된 채로 벌이는 조폭들의 패거리 싸움은 병두의 세계가 문자 그대로 진흙탕과 다르지 않음을 그려낸다. 좁은 봉고차 안에서 벌어지는 격투, 서점의 책장을 뛰어넘는 추격전 등 이어지는 액션 장면은 저마다 특색으로 눈요기의 쾌감 역시 강렬하게 자극한다. 특히 주인공 병두가 그만의 긴 팔다리를 쭉쭉 내지르는 장면은, 유하 감독의 전작'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권상우)의 필살기만큼 다부지지는 못할망정 제법 탄성을 자아낼 그림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하나도 새롭지 않다면 심한 말이다. 배우 조인성에게서 기존 이미지를 뒤집고, 일상성과 잔혹함을 동시에 갖춘 조폭의 얼굴을 그럴듯하게 뽑아낸 점에서는, 특히나 젊은 관객들에게 확실히 새로운 영화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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