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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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숨지기 나흘 전 조카를 불러 자신의 묘비에 세겨질 묘비명(墓碑銘)을 당부했다. 자신이 직접 4언(言)24구(句)로 삶을 정리했다. 제자들의 거창한 헌시가 거북했던 듯하다. 퇴계 스스로 쓴 묘비명, 즉 자명(自銘)은 당대 대유학자의 것이라기엔 너무 소박하다. 스스로를 낮추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삶에 감사하며 떠나는 마음가짐이 표연하다.

"나면서부터 크게 어리석었고/자라면서 병이 많았네/중년에 어찌 학문을 좋아하게 됐고/말년엔 외람되게 벼슬이 높았네…근심 속에 즐거움 있고/즐거움 속에 근심 있네/저 세상으로 떠나며 생을 마감하는데/다시 무엇을 구할 것인가."

불가(佛家)에선 세상을 더럽히는 인간의 오욕(五欲)으로 식(食).색(色).명예(名譽).물(物).수면(睡眠)을 꼽는다. 욕심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 삶의 고비마다 다르다. 대체로 나이가 들면서 네가지 욕심은 사라지는데, 유일하게 남아 더 집착하게 되는 욕심이 명예욕이라고 한다.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욕심이다. 죽어서도 놓지 못하는 명예욕의 상징이 묘비명일 것이다.

묘비명은 죽음의 형식이자 매장의 양식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인의 공적을 기리는 취지는 같다. 서양에선 교회 내에 매장하는 풍습에 따라 석관의 뚜껑에 묘비명을 새겼다. 그러다 석관이 점차 기독교적 내세관을 구현한 조각으로 장식되면서 묘비명 역시 시인의 미사여구로 화려해졌다. 중국 한(漢)나라 이래 비석 문화를 수입한 우리나라에선 입석에 치적을 열거함으로써 고인의 명예를 빛냈다. 한때 조선 선비들 사이에선 스스로 짓는 묘비명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 전통이 끊어진 지 오래인데, 원로 작가인 한말숙(72)씨가 격월간 문예지 '한국문인' 최근호에 기고한 가상 유언장에서 스스로 만든 묘비명을 공개했다."평생 감사하며 살다가, 한점 미련없이 생을 마치다"는 대목이 퇴계의 자명을 생각케 한다. 1957년 김동리 선생의 권유와 추천으로 등단해 93년 펜클럽 한국본부 이름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받는 등 문단의 맏언니로 남 못지않게 활동해온 소설가의 자명으론 담백하다.

스스로의 묘비명을 지어보는 것이 꼭 망측한 일은 아니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기도 하지만 남은 삶의 좌표를 정하는 의미도 있다. 굳이 늙은이들만의 일도 아니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