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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못 걷겠어" 사라마구 향한 순례길서 흐느낀 여성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8)

느닷없이 나타난 토마토밭. 지도 검색도 되지 않는, 화살표도 없는 밭이랑을 넘어 차도가 나타날 때까지 두 시간을 넘게 헤맸다. [사진 박재희]

느닷없이 나타난 토마토밭. 지도 검색도 되지 않는, 화살표도 없는 밭이랑을 넘어 차도가 나타날 때까지 두 시간을 넘게 헤맸다. [사진 박재희]

길을 잃었다. 도저히 길을 잃을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화살표를 확인했고 제대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토마토밭이다. 길은 없고 화살표도 없고 구글 신 마저 응답이 없다. 휴대폰을 껐다가 켜고 모래시계만 돌리는 지도 앱을 지웠다가 재실행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화살표를 봤던 지점까지 돌아가려면 족히 한 시간은 넘게 걸릴 텐데 이미 뙤약볕 아래 2시가 넘었다. 방향만 잡고 가는 거다. 배운 대로 하는 수밖에. ‘길이면 길이지 차도 인도 따로 있냐’며 갓길 없는 차도로 인도했던 화살표의 기억을 되살려 아득히 펼쳐진 토마토밭을 가로질렀다.

차도가 아닌 포근한 시골길을 걸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길을 잃고 헤매기 100m 전. [사진 박재희]

차도가 아닌 포근한 시골길을 걸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길을 잃고 헤매기 100m 전. [사진 박재희]

사람들은 대체로 소질이 있거나 잘하는 것을 즐겨 하지 않나? 어쩌자고 나는, 지도를 돌려가며 읽는 수준의 방향치인 데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세 가지 중에 하나로 무거운 것을 꼽으며 ‘표지판 지나치기’ 특기로 툭하면 길을 잃으면서 왜 하필 이런 도보 순례를 좋아하느냐 말이다. 11kg 배낭을 메고 뙤약볕 아래에서 밭이랑을 넘는 점프를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반복하면서 꽤 진지하게 반성했다.

오늘의 목적지 아지냐가(Azinhaga)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쓴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고향이다. 영화를 본 후 책을 찾아 읽고 받았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떤 문장은 하나가 페이지를 넘었다. 내가 질색하는 만연체에다 서술이나 직접 대화, 간접화법조차 구분하지 않고 쓴 책인데 끝까지 긴장감은 거침없었다. 포르투갈이 낳고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했던, 포르투갈엔 애증의 대상이었던 노벨상 수상 작가 주제 사마라구가 태어난 곳으로 가는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태어난 고향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 아지냐가에는 벤치에서 책을 읽는 사라마구의 동상이 있다. [사진 박재희]

주제 사라마구는 태어난 고향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 마을 아지냐가에는 벤치에서 책을 읽는 사라마구의 동상이 있다. [사진 박재희]

“아지냐가? 거기 가봐야 볼 것도 하나 없어.”
하루를 쉴만한 가치가 없다고들 했다. 그건 누가 정하는 거지? ‘볼 것’이나 ‘구경할 가치’를 규정하는 기준은 딱하지만 공허한 ‘유명세’인 경우가 많다. TV에 나온 곳, 소셜미디어에 인증샷을 올리면 알아봐 주는 곳, 누군가 ‘죽기 전에 어쩌고’ 리스트에 올린 곳, 심지어 어떤 연예인이 찾아간 카페 등등.

유명세에 따를 마음이 없는지라 전 세계 말의 수도라고 불리며 해마다 세계 최고의 명마 루시타노 페어가 열리는 골레긍(Golegã)은 내 선택지가 아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생가가 있는 마을 아지냐가를 택했다. 더 가깝기도 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땅속으로 뿌리내리기를 시작한 두 다리에도 합당한 선택이다.

한 여자는 울고 다른 여자는 먼 곳을 보며 1초에 한 번씩 눈을 껌뻑였다. 우는 여자는 계속 무슨 말을 했는데 불어다. 고등학교 때 1년간 제2외국어로 배운 나의 불어 수준은 딱 여기까지다. ‘불어구나’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 당연히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것이 원망이나 비난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울고불고’를 계속하는 여자 엘카(Elke)와 말없이 앉아 눈을 껌뻑이던 여자 그레타(Greta)를 아지냐가의 카페에서 만났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당신은 무엇을 했냐고 신에게 삿대질을 한 주제 사라마구의 고향 '아지냐가(Azinhaga)' 사라마구 재단은 리스본으로 이전했지만 그의 생가를 찾은 사람이 많다. [사진 박재희]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당신은 무엇을 했냐고 신에게 삿대질을 한 주제 사라마구의 고향 '아지냐가(Azinhaga)' 사라마구 재단은 리스본으로 이전했지만 그의 생가를 찾은 사람이 많다. [사진 박재희]

“이렇게 덥고 힘든데 왜 다들 걷는 거야? 더는 못 가겠어.”
그레타는 힘이 넘치는데 엘카는 걷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둘은 40년 친구라고 했다. 엘카는 그레타가 자기 짐까지 모두 들으려 한다며 짜증을 냈다. 그레타가 너무 빨라 도저히 보조를 맞추지 못하겠다며 코가 빨개지도록 울었다. 다 큰 어른이 얼마나 힘들면 이럴까 하면서도 잠시 우는 엘카의 친구가 안 됐다고 생각했다. 왠지 나는 저렇게 대놓고 우는 사람이 무섭다.

“병원이나 약국이 있겠지 했는데 없네요. 약 가져오는 걸 잊었어요.”
그레타는 막막한 표정이었다. 내게 약이 있다. 있다 뿐인가 아주 많다. 배낭에서 소염진통제를 찾아 엘카에게 먹이고 붙이는 파스도 넉넉히 나눠줬다. 그레타는 움직이지도 못하겠다는 엘카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의 배낭을 자기 것에 묶어 멨다. 둘은 골레긍으로 가지 않고 나와 같은 까사(Casa, 우리나라 고급 민박이라고 보면 된다)에 묵기로 했다.

“짐은 내가 들 테니 넌 걷기만 하면 돼.”
“난 이제 못 걷겠어. 싫어. 집으로 돌아갈래.”
“다 온 거야. 파티마까지 이틀만 가면 되는데 포기하지 마.”

그레타는 저녁을 먹는 동안 엘카를 달래며 용기를 주려 했는데 엘카는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약을 먹고 푹 자면 다 나을 거라고, 내일이면 거뜬해질 거라고 엘카를 다독였는데 숙소 주인인 엘레나(Helena)가 끼어들었다. ‘오늘은 저녁 하기 싫다’고 선언하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했다.

요리할 기분이 아니라며 운전해서 20분이나 걸리는 식당으로 우리를 데려왔다. 숙박요금에 포함된 식사 비용으로 감당하기엔 비싼 곳이었는데 그는 그날 요리하지 않을 자유를 위해 우리에게 비싼 저녁을 대접한 여성이다.

매년 11월 루스티노 명마 대회가 열리는 골레긍(Golega)에는 교통 표지판에서도 사람보다 말이 먼저다. [사진 박재희]

매년 11월 루스티노 명마 대회가 열리는 골레긍(Golega)에는 교통 표지판에서도 사람보다 말이 먼저다. [사진 박재희]

“못 걷겠다잖아. 자꾸 할 수 있다고 하지 마. 엘카, 안 걸어도 돼. 이건 네 길이야.”

엘레나의 말에 참았던 눈물이 터졌는지 엘카는 연신 눈물을 닦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언제나 뒤처지는 게 너무 싫어. 그레타는 내 배낭까지 다 짊어지고도 펄펄 날아. 난 아무리 노력해도 허덕허덕 따라가기 바쁘다고. 나는 힘든데 친구는 늘 힘이 넘치니까 같이 걷는 게 아니라 끌려가는 기분이야. 힘들고 이제 못 참겠어.”

친구 대신 스스로 짐을 메고 힘든 내색도 없이 이끌어준 그레타가 서운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자기 옆에서 늘 처지고 모자란 기분이었다는 엘카 마음을 알아차리고 미안해한다. 그레타가 목멘 소리를 하는 바람에 우리는 함께 찔끔거렸다. 처음 만나 겨우 몇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어떻게 다 같은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포르투갈 가을 저녁의 핑크빛 노을. [사진 박재희]

포르투갈 가을 저녁의 핑크빛 노을. [사진 박재희]

그림 같던 저녁노을 때문일 수도 있고 함께 나눈 와인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순례길에서 받는 선물이다.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길을 걷는 동안 사람들은 잃었던 마음을 찾게 된다. 비를 맞는 친구 곁에서 함께 비를 맞는 마음, 우산을 내미는 대신 기꺼이 빗속으로 들어가는 마음 말이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신영복)

박재희 모모인컴퍼니 대표·『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저자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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