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북관계 서두르다 오히려 이르지 못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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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북·미 고위급 회담이 갑작스레 연기되며 비핵화 일정에 브레이크가 걸렸는데 정부는 남북 경협사업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어 걱정스럽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어제 북·미 간 뉴욕 회담이 불발된 게 “북측의 통보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먼저 연기 카드를 꺼냈다는 이야기다. 여러 이유가 거론되나 제재 완화 요구에 미국이 꿈쩍도 하지 않자 북한이 불만을 터뜨린 결과란 분석이 많다.

실제 북한의 선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의 태도는 강경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회담 연기와 관련해 “서두를 게 없다”는 말을 7차례, “제재 유지”를 4차례나 반복하며 북한의 ‘호응’ 조치가 있어야 제재 완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시기도 “내년 언젠가”라고 했다가 “내년 초 언젠가”로 말을 바꿨다. 북·미 회담 교착 상태가 장기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문제는 이 같은 변화에 아랑곳없이 남북관계에서 속도를 내고 싶어 하는 정부의 조바심이다. 통일부가 내년도 남북협력기금 사업비 중 북한과의 철도 및 도로 협력사업에 무려 3500억원이 넘는 거액을 비공개로 끼워 넣었다. 정부는 또 대북 융자예산을 1000억원이나 대폭 증액했다. ‘북한에 퍼주기’ 비난을 피하기 위해 빌려주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북한에 제공했다 받지 못한 돈이 3조3000억원에 달해 ‘꼼수’란 말을 듣는다.

남북 관계는 개선돼야 하고 이를 위한 남북 경협은 필요하며 또 중요하다. 그러나 북·미 회담이 겉돌며 북한 비핵화에 대한 믿음이 좀처럼 형성되고 있지 않은 현 시점에선 성급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남북 경협은 비핵화 진전과 발을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대북제재 대열에서 먼저 이탈하고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국제사회에 줄 수 있다. 서둘러 가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할 수 있음을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