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 구인광고 본 순간 “바로 이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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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3살에 박사 학위를 받은 나는 1963년 남플로리다대 물리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어린 나이에 대학에서 가르치게 됐다. 학생들보다 나이가 어린 ‘꼬마 교수’라며 지역 언론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어린 나이에 교수를 맡았으니 대학 내에서는 물론 대학 도시 안에서도 나름대로 꽤 유명한 인사가 됐다.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남플로리다대 정문 모습. [사진 남플로리다대 홈페이지]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남플로리다대 정문 모습. [사진 남플로리다대 홈페이지]

다른 친구들은 군대에 다녀와서 미처 대학 졸업도 못한 어린 나이에 나는 결혼을 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심지어 대학 조교수까지 됐으니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결코 내가 잘난 게 아니라 많은 분이 돌봐주는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나를 돕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음을 계속 느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67) #<19>번민 속에 보낸 첫 교수시절 #24살 남플로리다대 조교수 시절 #생활 안락했지만 만족은 못해 #미 과학기술 심장부 진출 욕심 #김법린 원장의 당부도 떠올라 #프린스턴 핵융합연구소 모집 공고 #최고 과학자와 함께 연구할 기회

이렇게 플로리다에서 시작한 교수 생활은 아쉽게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실 강의와 연구를 하고 가족과 윤택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측면에서는 괜찮은 자리였다. 56년 개교한 남플로리다대는 당시 야심차게 규모를 키우고 있었다.

미국 남플로리다대 공과대학 빌딩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남플로리다대 공과대학 빌딩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하지만 자꾸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만족할 순 없어.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미국에 온 이상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조국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오라는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의 당부가 매일 같이 떠올랐다. 더 깊은 학문에 대한 미련과 함께 유학을 온 본래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 나를 안달하게 했다. 대학에 순조롭게 자리 잡고 유명 인사가 됐다는 것만으로 학구열과 조국에 대한 부채감을 덜어낼 수 없었다. 나는 “하루빨리 따뜻하고 안락한 플로리다를 떠나 어떻게든 미국 과학기술의 핵심부로 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날마다 했다. 내가 왜 미국에 왔는지를 계속 고민하게 됐다. 플로리다에서의 첫 교수 시절을 이렇게 번민 속에서 보내야 했다. 사실은 내 정체성과 사명을 제대로 찾아가는 고민의 시간이었다.

미국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를 견학 중인 사람들. [사진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 홈페이지]

미국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를 견학 중인 사람들. [사진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 홈페이지]

그러던 중 갑자기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인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에서 낸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핵융합은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학문 분야였다. 핵분열이나 핵융합은 가공할 무기체계인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이다. 하지만 이를 잘 활용하면 값싼 청정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발전 기술이 된다.

미국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를 설립한 라이먼 스피처 박사. 미국의 핵융합 에너지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그는 정근모 박사가 꼽은 은사 중 한 명이다. [사진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 홈페이지]

미국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를 설립한 라이먼 스피처 박사. 미국의 핵융합 에너지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그는 정근모 박사가 꼽은 은사 중 한 명이다. [사진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연구소(PPPL) 홈페이지]

오늘날에도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과학기술이 가장 앞선 극소수 선진국만이 관련 기술을 보유하거나 연구 중이었다. 그야말로 미국 과학기술의 뇌수에 해당하는 첨단 분야였다. 그곳에 가면 미국의 최고 과학자들과도 어울릴 기회가 많을 게 분명했다. 한국에서 온 젊은 과학자인 내가 이런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즉시 이력서를 보냈다. 초조한 날이 지나고 며칠 뒤에 PPPL 측에서 연락이 왔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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